저의 티벳 여행 때문에 시베리아 여행기 후편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쉬고 티벳 여행에서 돌아와서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여행기는 3일 치라 좀 깁니다. 천천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2007년 9월 25일, 화요일, Komsomolsk, Vanino 기차
(오늘의 경비 U$4: 식료품 90 *환율 $1=25)
기차가 오전 10시 반에 Komsomolsk에 도착하여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섰다가 오후 4시 반에 Vanino를 향해서 떠났다.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몰랐는데 내 앞 침대에 자는 여자는 외출 차림을 하고 나가고 기차가 거의 텅 비도록 승객이 없어져서 (짐은 놔두고) 이상해서 기차 안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보고서야 알았다. 기차 안에 시간표가 있다는 것도 읽은 방법도 며칠 전에 알았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다. 어제 Khabarovsk에서 날씨가 이렇게 좋았더라면 구경을 참 잘했을 텐데 아쉽다. 텅 빈 기차 안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조용한 여섯 시간을 보냈다. 기차 화장실이 6시간 동안 잠겨서 기차역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기차역에 있는 매점에 가서 오렌지주스와 생선 포를 사서 먹었는데 생선 포가 너무나 짜서 간신히 먹었다.
내가 주로 먹는 러시아 음식들은 몸에 좋지 않은 것들뿐이다. 짜고 기름이 푹 배인 음식들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만큼 야채를 많이 먹지 않는다. 슈퍼에는 싱싱한 야채와 과일은 별로 없고 재래식 시장에나 가야 볼 수 있다. 한국이나 미국만큼 슈퍼에 야채와 과일이 좋은 나라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러시아 남자들은 별로 뚱뚱하지 않다. 답배를 많이 피고 보드카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평균 수명이 매우 짧아서 노인들이 한국이나 미국처럼 많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오래된 통계인지 몰라고 남자 평균 수명 58세로 나와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매우 뚱뚱하다. 남자보다 술과 담배를 덜하는 대신 음식을 많이 먹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식사를 하고있는 여자 노인을 보았는데 닭다리, 기름에 절은 빵, 감자 샐러드 등을 먹는데 거의 꾸역꾸역 먹는 수준이다. 잘 걷지를 못하는 여자 노인들을 많이 본다. 버스나 전차를 탈 때는 정말 힘들게 탄다. 모두 과식하는 탓인 것 같다.
허리에 찬 전대가 헐거워져서 조금 줄여서 맸다. 그동안 체중이 좀 준 기분이다. 다른 곳보다 뱃살이 조금 빠진 것 같다. 그동안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배탈도 한번도 안 났다.
어제 카메라를 타일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행히도 아무 것도 망가진 것이 없다. 확실히 일본 물건은 질이 좋다. 아마 다른 나라 카메라였다면 어딘가 고장이 났었을 것이다.
오늘 두 번이나 차장에게 욕을 먹었다. 두 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욕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언가 나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차장을 너무나 많이 만난다. 기차역 매점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파는 것이 무슨 권세인 것처럼 행동을 한다. 아마 구 소련 시절 물건이 귀했을 때 그랬던 모양이다. 매점에서 일하는 여직원을 대하는 손님들은 모습은 꼭 선생님을 대하는 학생의 모습이다. 괴상한 나라다. 북한도 그럴까?
큰 기차역에는 소위 서비스 센터가 있다. 보통 찾기도 힘든 곳에 있고 가보면 항상 텅텅 비어있다. 가구랑 돈 들여서 잘 해놓고 이용은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오후 6시 정도에는 닫아버린다. 인터넷을 한다고 써놓고 컴퓨터도 몇 대 있는데 물어보면 인터넷이 안 된단다. 높은 사람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생긴 제도인 모양인데 돈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는 아직 멀었다.
Komsomolsk는 공산당 청년 당원의 도시라는 뜻이다. 1930년대에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란다. 처음에는 청년 당원들이 세우기 시작했으나 진척이 지지부진하자 죄수와 일본군 포로를 투입해서 세웠단다. 당시 소련 신문 방송에 대대적으로 선전이 되었다는데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도시다. 소련의 실패를 상징하는 도시다. ![]() Komsomolsk 기차역 ![]() 기차역 앞에 나무들이 아름답다 ![]() 단풍이 한창이다 2007년 9월 26일, 수요일, Vanino, 사할린 페리선
(오늘의 경비 U$44: 배표 850, 아침 95, 식료품 80, 더운물 10, 화장실 10, 샤워 50 *환율 $1=25)
아침 6시에 Vanino에 도착하여 우선 기차 역사로 들어갔다. 이 도시에서 사할린 가는 페리선을 타야하는데 어떻게 타는 지를 모른다. 역사에 가서 누구인가에게 물어봐야 한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 중 기차역 앞 주차장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역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역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서 갔다. 역 안에서 이들은 아직 열지 않은 한 매표소 창구 앞에 가서 창에 붙여있는 안내문을 읽는다. 기분에 사할린으로 가는 사람들 같았다. 러시아 어 책을 꺼내서 이곳이 질문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동양 계 한 여자가 물어 볼 것이 있느냐고 한국말로 말을 건다.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원하던 한국 교포를 만난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을 이런 때 쓰는 모양이다.
결국 이 여자 덕분으로 배표를 사고 배에 올라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오후 4시경 Vanino를 떠났는데 내일 아침 7시에 사할린 도착이란다. 이 여자에게 사할린에서 민박도 부탁해 놓았다. 호텔은 비싸서 못 들고 이 여자가 민박을 마련해 줄 모양이다.
웃기는 것은 이 여자는 지금 모스크바에 사는 작은 딸 방문중에 사할린에 사는 언니의 급한 연락을 받고 사할린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인데 언니의 급한 연락이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알리지도 않고 돌아가고 있는데 집에 돌아가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일만 없으면 자기 집에 묵어도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어떻게 주선해 줄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본군 징용으로 사할린에 왔다가 해방이 되고도 못 돌아간 케이스인데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게 산 것 같지는 않다. 딸만 둘인데 큰딸은 한국에 유학 갔다가 남편을 만나서 아들만 둘을 낳고 서울에 잘 살고 있고 작은딸은 모스크바에서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한다. 서울에도 자주 가는 모양이다. 이들의 사할린 생활은 1980대 까지는 한국에 살았던 것보다 더 낳았었던 것 같다.
지금 사할린에는 일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전부 일본 정부에서 모셔갔다고 한다. 한국 사람은 아직도 많은데 (전체 사할린 인구의 5% 정도) 늙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일본 정부와 모종의 타협이 되어서 안산에 아파트촌을 세워서 나이 많은 사람들을 (1945년 이전 탄생) 모두 데려다 생활비를 대주면서 살게 하고 있단다. 한국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웬만한 한국사람들은 안산에 그런 아파트촌이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자기 친척 한 사람은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데 1960대에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사할린 교포 젊은이들을 모집해 갔다고 한다.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한다. 약 1000여명이 갔는데 그중 20여명 빼고는 모두 북한 당국의 끈질긴 권유로 북한 국적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소련 국적을 유지했던 20여명은 공부가 끝난 후 사할린으로 돌아왔으나 나머지는 모두 북한을 떠나지 못했다 한다. 그들을 북한으로 보낸 부모들은 또 다른 비극을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Vanino의 아침 해
Vanino 기차역
Vanino 길거리 풍경
길거리에 등대가 둘씩 왜 있나?
목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한국으로 가는 목제들일까?
사할린 가는 바다 길
15시간 가는 뱃길이다 2007년 9월 27일, 목요일, Yuzno-Sakhalinsk, Nogliki 기차
(오늘의 경비 U$344: 택시 250, Nogliki 왕복 기차표 1758, 기차표 시간 변경 766, 짐 보관 50, Khabarovsk 항공권 4000, 커피 50, 점심 639, Neryungri 기차표 1037, 인터넷 50 *환율 $1=25)
오늘은 아주 긴 날이다. 지금 Nogliki 밤 기차를 기다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Nogliki는 사할린 섬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다. 그곳에 가는 이유는 그곳이 사할린 남북을 달리는 철로의 북쪽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약 650Km 거리인데 기차로 약 14시간 걸린다. 사할린에 와서 사할린의 수도 Yuzno-Sakhalinsk 한곳에만 있다가 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이유는 Yuzno-Sakhalinsk에 잘 곳이 없기 때문이다. 기차역 부근에 있는 호텔 두 군데를 가봤는데 모두 빈방이 없단다. 비싼 호텔은 아예 가보지도 않았다. 이곳은 석유와 가스 붐을 타서 웬만한 호텔 방은 $200이란다. 그래서 다시 기차를 오늘밤과 내일 밤 호텔로 사용하기로 했다.
말만 듣던 사할린에 왔으나 별로 기분이 안 난다. 비가 하루 종일 내려서 모든 것이 뿌옇기 때문이다. Yuzno-Sakhalinsk의 길거리 풍경은 지금까지 봐온 시베리아의 다른 도시와는 많이 다르다. 건물이 다른 도시들처럼 유럽풍도 아니고 시베리아 전통 목조건물도 안 보인다. 그럴 것이 이 도시는 러시아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가 아니고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사할린 섬 남쪽 반을 차지했던 일본이 건설한 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도시나 마찬가지다. 사할린의 총 인구는 약 50만이고 그중 약 20만이 Yuzno-Sakhalinsk에 산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 계 백인이다. 가끔 동양 계 사람들이 보이는데 모두 한국 사람들 같다. 사할린의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Yuzno-Sakhalinsk에 사는데 약 2만 명 정도 된단다. 원래 3만 정도였는데 노인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이주했다 한다.
오늘 새벽 2시 반경에 깨운다. 아침 7시에 배가 사할린에 도착할 것이라고 했는데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단다. 그러나 하선은 4시 반경에나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일찍 깨운단 말인가. 깜깜한 선착장에 내려서 어제 만난 나의 구세주 한국여자와 (고정임, 부모님은 모두 경북 대구 남쪽 근처 출신이란다) 함께 택시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인 Yuzno-Sakhalinsk로 왔다. 우선 자기 언니 아파트로 들어가 잔다. 간호부로 일하는 언니가 혼자 살고 있는데 언니가 나를 안 받겠다면 자기네 집으로 가 잔다. 그러나 남편과 단판을 지려고 가는 여자를 어떻게 따라 간단 말인가.
언니네 아파트가 작지만 아담하다. 러시아 아파트는 밖과 안이 매우 다르다. 밖에서 보면 다 쓸어져 가는 건물 같은데 안은 잘 꾸며 해놓았다. 밖은 아무도 관리를 안 해서 그런 것이다. 언니가 아침을 차려 주어서 잘 얻어먹고 빈방에 들어가서 9시까지 한숨 푹 잤다. 10시쯤 동생 여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언니 집을 나왔다. 비록 나에게 민박을 주선해주지는 못했지만 Yuzno-Sakhalinsk까지 오는데 도와준 것이 고맙다. 서울에서 가지고 온 조그만 선물을 하나 주었다. 남편과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한다. 1951년 생인 남편은 40대 중반의 독신 여자와 제법 깊은 관계인 모양이다.
Nogliki 기차표를 산 다음에 돌아오는 기차 시간이 좀 늦은 것 같아서 2시간 이른 차로 바꾸는데 문제가 생겼다. 수수료가 많아야 200루블 정도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766루블이 나왔다. 원래 기차표 값이 (2등 침대차) 1060루블이었는데 불과 20분 후에 바꾸러 갔는데 수수료가 766루블이 나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매표원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다. 주위에 영어나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있나 하고 찾았지만 아무도 없다. 주위에 약 20여명이 기차표를 사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어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보여‘서 한국어를 하느냐고 물어보니 못 한단다. 원래 기차표를 돌려달라고 했더니 그것은 벌써 취소되어서 줄 수 없단다. 결국 766루블 수수료를 내고 새 기차표를 받았다. 두 시간 일찍 오려고 원래 기차표 값의 70%가 넘는 수수료를 낸 셈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분이 몹시 아팠지만 조금 후에 달라졌다. 사할린을 떠나는데 다시 페리선을 타기가 싫어서 (떠나는 시간이 일정치 않고 기후가 나쁘면 며칠씩 결항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비행기로 Khabarovsk로 가기로 결정하고 비행기표를 사러 갔는데 론리에 4300루블로 나와 있어서 이제는 적어도 6000루블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4000루블이란다. 이 나라 물가가 지난 2, 3년 동안에 약 두 배 정도는 뛴 것 같은데 Khabarovsk 비행기 값은 오히려 300루블이 떨어졌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정말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게 마련인가보다. 그래서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비나 그치고 맑은 날씨가 되면 좋으련만 비는 계속 오고 있다. 한국처럼 이곳도 9-10월이 제일 날씨가 좋은 때라는데 꼭 장마 비 같이 내리고 있다.
항공권을 산 다음에 그와 연결시켜서 Khabarovsk에서 Neryungri까지 가는 (약 35시간) 기차표도 샀다. Neryungri에서 Yakutsk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이다. 이 기차표는 러시아에서는 마지막으로 사는 기차표다. 그 동안 기차표를 수없이 사고 기차와 기차역 신세를 많이 졌는데 이젠 그것도 마지막이 되어가고 있다. Neryungri부터는 더 이상 철로가 없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여행이 예상보다 빨리 끝날 것 같다.
사할린 교포 고정임 씨와 보낸 시간 동안 느낀 감정은 이곳 교포들이 한국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정부가 섭섭하게 해줘서 그럴까? 안산에 사는 사할린 노인들도 일본 정부 덕택에 그렇게 된 것이고 한국 정부는 하나도 도와준 것이 없단다. 또 다른 감정은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이곳 교포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 약간의 질투 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해방 후에 길이 막혀서 귀국을 못하게 된 사할린 동포들을 불쌍하게 생각해 왔는데 적어도 그곳에서 출생한 2세, 3세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고정임 씨도 (1952년 생) 공부를 잘해서 모스크바에 있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잘 나가던 여자였는데 이제는 한국을 부러워야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좋으나 싫으나 사할린의 젊은 사람들은 한국에 갈 생각은 없고 러시아에서 (한국에 유학해서 결혼을 해서 사는 고정임 씨의 큰딸은 예외의 경우인 모양이다)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 같다.
![]() 고정임 씨 언니 아파트 ![]() 이 침대에서 단잠을 잤다 ![]() 젊었을 때의 고정임 씨와 언니의 부부 사진을 몰래 찍었다 ![]() 사할린 수도 Yuzno-Sakhalinsk 기차역 ![]() 길거리 풍경, 러시아 계 백인들이 훨씬 많다 ![]() 아직 단풍이 지지 않았다 ![]() 내가 비싼 점심을 먹은 사할린스크 센터 건물이다 ![]() 일본 성같이 지은 사할린 박물관, 한국관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못 보았다 ![]() 비오는 날 결혼식 촬영을 하다니 Copyright (c) 2004- By 박일선. All Rights Reserved. 이 글과 사진은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수정하지 않고 저작자를 박일선으로 (혹은 Elson Park) 표시하는 조건으로 아무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흰 나무기둥을 보니역시 귀족나무 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