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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칠곡가시나들' 얼굴에 시 꽃이 피었다

한국일보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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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약목면 두만천변의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 칠곡군 마을학교에서 한글을 깨친 약목면 할머니들의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경북 칠곡 기산면에 ‘말하는 은행나무’가 있다. 비룡산 아래 각산마을에서 약 500m 떨어진 대흥사라는 작은 암자 앞이다. 잎 하나 남지 않은 겨울이지만 1,000년 가까이 됐다는 나무의 풍채가 위풍당당하다. 그런데 나무가 어떻게 말을 한다는 걸까? 옛날 인근 성주에서 퉁지미(각산마을)로 시집온 새색시가 이 나무 아래서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았고, 이후 마을 사람들도 남에게 말하기 힘든 속내를 은행나무에게 털어놓았단다. 그럴 때마다 은행나무는 꿈에 가장 사랑하는 가족으로 나타나 위로하고 해결책을 말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각색된 부분을 덜어내면, ‘말하는 은행나무’의 실상은 ‘말 들어주는 은행나무’였다. 낯선 산골로 시집온 새댁이 맘 놓고 하소연할 존재가 이 나무밖에 없었던 셈이다.

 

칠곡 기산면 비룡산 자락의 '말하는 은행나무'. 실제는 응어리진 속마음을 털어놓는 나무다.

‘말하는 은행나무’가 뿌리 내린 비룡산 너머는 약목면이다. 면 소재지를 가로지르는 두만천 주변에 알록달록 화사하게 단장한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가 있다. 읍내에서도 가난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천변의 낮은 집과 담장을 따라 여든이 다 돼서야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의 시화가 그려져 있다. 퉁지미 새댁처럼 한평생 며느리로, 또 여성으로 겪었을 고초가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데, 그들의 시는 배우는 기쁨, 가족과 지인에 대한 고마움, 꽃다운 시절의 두근거림을 담고 있다. ‘칠곡가시나들’은 2019년 개봉한 김재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약목면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 곡절 많은 인생살이에도 할머니의 시는 밝고 경쾌하다. 

시는 굳이 표준어로 옮기거나 교정을 보지 않고 처음 쓴 그대로 적었다. 경상도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일상에 살아 숨 쉬는 입말이어서 더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야야 와 그래 차를 세우노. 엄마요 앞에 더디 걷는 할매 보이 엄마 생각이 나네. 우리 엄마도 저래 걸어가겠지 싶어서 빵빵 거리도 몬하고. 딸이 그 말을 하니 내 눈에 눈물이 난다."
강금연(86)

 

"비가 오연 혼자 있으까, 쓸쓸하고 허전하고 집이 텅 빈 거 거꼬, 그때는 아들한테 전화해 본다. 오이야 하고 나면 눈물이 난다."
이원순(85)
 
"마당에 도래꽃이 만타. 영감하고 딸하고 같이 살던 우리집 마당에 도래꽃이 만타. 도래꽃 마당에 달이 뜨마, 영감 생각이 더 마이 난다."
박두선(87)

 

"우리 손녀 다 중3이다. 할매 건강하게 약 잘 챙겨 드세요. 맨날 내한테 신경 쓴다. 노다지 따라 댕기면서 신경 쓴다. 이뿌고 귀하다."

박월선(88)

 

"우리 며느리가 공부한다고 자꼬 하라칸다. 시어마이 똑똑하라고 자꼬 하라칸다."

곽두조

 

고민을 거듭하며 짜낸 시어마다 가난하고 못 배워 서러웠지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지난날의 따스한 추억이 묻어 있다. 총천연색 그림과 맞춤법을 무시한 언어 구사에 미소를 짓게 되지만, 돌아서서 곱씹을수록 울컥하는 속울음을 삼키게 하는 문장이다. 행간마다 먼저 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 자식 걱정과 며느리 자랑, 손주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밴 때문이리라. 설 밑이어서 더욱 뭉클하다.

 

 

약목면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 두만천변 낮은 담장을 장식하고 있다.

 

 

약목면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는 하천변 낮고 허름한 주택 담장에 그려졌다.

 

 

약목면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 남편, 자식, 손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약목면 칠곡가시나들 벽화거리. 할머니가 된 그들도 한때는 가슴 두근거리는 소녀였다.

200m 벽화에 담긴 시는 약 10편에 불과하지만, 칠곡가시나들의 작품은 총 1,500여 편에 달한다. 2006년부터 평균 연령 78세 할머니 400여 명이 칠곡군에서 운영하는 마을학당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가슴속 깊이 꼬깃꼬깃 숨겨 두었던 지난 삶의 이야기를 엮은 글들은 ‘내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 ‘작대기가 꼬꼬장 꼬꼬장해’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시가 뭐고?’ 등 총 8종의 시집으로 출간됐다.

<한국일보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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