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떡 <심영자>
2023.05.29 19:20
시루떡
심영자
오늘 친목 모임에서 찹쌀시루떡을 나눠줬다. 따끈따끈한 게 바로 먹고 싶었다. 몇 시간을 참았다. 집에 와서 꺼내니 아직도 따뜻하다. 붉은 팥을 넉넉하게 뿌리고 호박고지까지 섞인 두툼한 찹쌀시루떡을 맛있게 먹었다.
나의 어린 시절, 가을걷이가 끝나면 집에서 고사떡을 했다. 가을이 되면 할머니가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을 빙글빙글 돌려 깎아 고지를 켜서 울타리에 널어 말리셨다. 낮에는 햇볕을 받고, 밤에는 이슬을 맞으며, 늙은 호박고지는 쫀득쫀득하게 말라갔다. 엄마가 찹쌀가루에 호박고지를 버무려 섞고, 켜켜이 붉은 팥을 살아 듬뿍 얹어 큼지막한 시루에 넣고 고사떡을 찌셨다. 나는 가을에 하는 고사떡을 미신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확에 대한 감사요. 이웃과 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호박고지가 들어간 찹쌀시루떡도 맛있었지만 나는 두툼한 무시루떡을 더 좋아했다. 갓캐 온 가을 토종무는 몸이 단단하고 맛이 달다. 그걸 채쳐서 멥쌀가루에 버무려 켜켜이 붉은 팥을 넣고 두툼하게 쪄낸 부드럽고 달콤한 엄마표의 그 무시루떡. 이제는 어딜 가도 맛볼 수 없는 추억의 떡이 됐다. 요즘 세대는 빵이나 케이크에 입맛이 젖어 시루떡엔 관심도 없다. 어느 해인가 엄마 제사에 갔더니, 친정 올케가 작은아씨들이 좋아하는 무시루떡을 일부러 떡집에서 맞춰왔다며, 언니와 내게 한 보따리씩 싸줬다. 어찌나 반갑고 맛있던지. 엄마를 느끼게 해줬다. 그날 오빠가 재협에미는 나물을 좋아한다고 채근하여 제사상에 오른 나물을 골고루 싸주던 올케. 이젠 그 올케도 가고 친정에 가야 친정맛이 안 난다. 조카며느리들이 애써 차려냈지만, 시어머니의 그 깊고 구수한 손맛을 내기엔 한참 멀었다. 차츰 내 주위가 휑해지는 것 같다. 언니도, 형부도, 올케도 가고, 내 동기는 달랑 오빠와 나 짝 잃은 두 마리 거위가 됐다.
낙엽 진 거리에 나목만 쓸쓸하다. 달달한 호박고지를 씹으며 70여 년 전 동심의 거리를 걷는다. 할머니, 엄마, 종조모들, 당숙모들. 동치미가 가득한 양푼을 가운데 놓고, 김이 피어오르는 고사떡을 먹으며 왁자지껄 깔깔대던 그 낯익은 얼굴들. 나도 그 틈에 끼어 부드러운 무시루떡을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다.
2018. 10. 28
|
댓글 12
-
김동연
2023.05.29 22:08
-
이은영
2023.05.30 10:12
영자 잘지내지?
우리 자랄때 팥시루떡과 무시루떡은 지금도 군침을 돌게 하는 음식이네요.
요사이는 떡에 설탕을 조금씩넣어 달아서 못먹고
동대문 시장에 가면 소금만 약간 넣은 팥시루떡과
무시루떡을 사오곤 한단다.
글 쓰는 전공으로 공부한 너의 글은 읽을수록 좋은 글이구나.
너의 사진은 생각난다, 우리가 비원에 갔을때
툇마루에 앉은 너를 이태영씨가 찍으시든 것같았어.ㅎㅎ
-
엄창섭
2023.05.30 10:32
동창회보에 실린 아름다운 글을 다시금 다른 멋진 모양으로 재생시켜 읽을 수 있게
해주니 감사합니다.테두리와 꽃이 한층 더 글을 품위 있게 해 주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회보의 다른 아름다운 글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심영자
2023.05.30 13:28
이태영님, 부족한 글을 다시 소환해주셔서
부끄럽고 감사합니다.어쩐 일인지 댓글 자격이 없다고 나와
그동안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김동연, 이은영 ,엄창섭님 모두 반갑습니다.
그리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들러 인사 드리겠습니다. -
김인
2023.05.30 18:34
와우~ 시루떡. 어려서 부터 떡을 좋아
해서 내별명이 떡보람니다. 떡이라면
다 좋은데 그중에서도 시루를 드루치기
해 쩨내는 두툼한 팥고물떡, 호박고
지는 저리가라고요, 팥고물 시루떡이지요.
절구에 떡매를 쳐서 만든 인절미, 떡밥을 칼로 쑥쑥 써러 콩고물을 묻혀 입에
한웅큼 너주시던 엄마의 인절미 그 떡
맛, 또한 잊을수 없는 백미지요. 급히
먹느라 인절미가 목에 걸린걸 등을 두
드리며 쓸어 주시던 엄마의 손맛, 다
옛날의 그리움이네요.
태영이 새단장해 글 올려주니 고맙고.
동연씨 다른 여러사람의 댓글도 소환
해 주시면 고맙겠너요. 읽어보게 !!
심영자님 시루떡, 나를 환장하게 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김포에서 떡보가.^^♡ -
심영자
2023.05.30 20:06
김인 님,
"떡밥을 칼로 쓱쓱 썰어 콩고물을 묻혀
입에 한웅큼 넣어주시던 엄마의 인절미"
엄마에 대한 그리움, 엄마의 손맛에 대한 향수가 어린
글에서 떡보 김인 소년이 보입니다.
떡을 먹고 자란 우리세대는 다 떡보였지요.
늙으면 과거를 먹고 산다고 하는데
김인 님 덕분에 내 어린 시절을 또 음미하게 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이초영
2023.05.31 02:41
영자야, 오랫만에 너의글 반가웠어.
너의 글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수필이다 느꼈어.
과장된 미사여구의 나열없이 인위적인 꾸밈이 없이
일상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는 너의 수필이
더우기 쉽고 고운 우리말로 간결하게 쓴 네글이
한번 읽으면 끝까지 읽게되는 맛이 있어 좋다.
너의 단아한 자태가 묻어나는 글이 좋다.
몇년전에 보내준 너의 수필집을 앉은 자리에서 밤 12시가 넘도록
통독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태영님, 동연이 말같이 앞으로 동문님들의 옛글을 많이 올려 주시면
11 싸이트트에 새로운 page가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
심영자
2023.05.31 07:21
초영아, 반가워. 너무 과분한 칭찬에 민망하네.
나는 네 글이 참 좋아. 살아가는 평범한 얘기를
기교도 부리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듯 네 푸근한 인품을 꼭 닮았어.
그동안 쌓아 놓은 글들은 모아 엮어 봐.
너의 수필집을 받고 싶네.
여기서 자주 만나. -
김승자
2023.05.31 20:52
글은 이렇게 써야하는건데!
너무나 정경운 너의 글,
다시 읽어도 다정한 삶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너를 본다.
너의 시루떡을 상상하면서 늘 따뜻한 너를 떠올리네.
방학에 시골집에 다녀오면서 종이에 싼 엿뭉치를 내 손에 쥐어주었지!
아름다운 영자의 글을 다시 읽고 회상에 잠기게 해 주셔서
이태영님, 감사합니다.
-
심영자
2023.05.31 23:04
승자야,
너 그엿을 기억하고 있구나. 아유 고마워. 겨울방학 때
엄마가 해주신, 촌스런 시골 냄새가 나는 엿.
아름답게 기억해주니 이렇게 기쁠 수가.
승자야, 하와이에서 네가 선물한 그 스카프를
두를 적마다 따뜻한 너를 생각한다.
내 글을 또 새롭게 칭찬해줘서 아주 기뻐 고마워. -
황영호
2023.05.31 22:23
다시 읽어보는 심영자님의 글 '시루떡'
가슴속에 숨은 듯 잊고 지내던 먼 어린 시절의 그리움을 불러줍니다.
학교를 마치고 대문을 들어서면 꽃밭에서 외가집에서 손수 옮겨다 심은 유난히도 좋아하시던 목단꽃을
어르만지시다가 말고 깜짝 놀라시는 몸짓으로 먼 길을 다녀오는 자식을 대하듯 환한 얼굴로 반겨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가슴저리도록 생각나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심영자
2023.05.31 23:20
황영호님,
그 먼저에도 넘치는 칭찬을 해주셨는데
이렇게 과찬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구나 제 글로 하여 황영호님이 어머님을 그리워하시는
절절한 모습이 제게는 더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제 글을 올려주셔서 여러 친구들과 대화하게 해주신
이태영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번호 | 제목 | 이름 | 날짜 | 조회 수 |
---|---|---|---|---|
17942 | 마주 보면 가슴이 ‘쿵쾅’… 심장이식 남녀, 부부 된다 [8] | 엄창섭 | 2023.06.06 | 100 |
17941 | 인생의 야간 열차 [3] | 최종봉 | 2023.06.06 | 43 |
17940 | 울릉도 쌀 다시 맛본다…명맥 끊긴 벼농사 36년 만에 재개 [2] | 이태영 | 2023.06.06 | 92 |
17939 | 2014년 서유럽 여행기, 스페인 편 - Seville [2] | 박일선 | 2023.06.04 | 26 |
17938 | 현충원 참배 [4] | 정지우 | 2023.06.03 | 59 |
17937 | 관계의 기록, 풍경으로의 건축 [8] | 김동연 | 2023.06.02 | 98 |
17936 | 쉼터 (친구로부터 받은 글) [7] | 최종봉 | 2023.06.02 | 62 |
17935 | 인사회 모임은 6월 7일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3] | 이태영 | 2023.06.02 | 49 |
17934 | 2014년 서유럽 여행기, 스페인 편 - Seville [2] | 박일선 | 2023.06.01 | 26 |
17933 | 6월 28일부터 시행되는 만 나이 계산법은? [6] | 엄창섭 | 2023.06.01 | 94 |
17932 | 물빛 자국 마다 - 김영교 [6] | 김동연 | 2023.05.31 | 80 |
17931 | 서울숲 산책 [3] | 이태영 | 2023.05.31 | 111 |
17930 | 2014년 서유럽 여행기, 스페인 편 - Gibraltar [4] | 박일선 | 2023.05.30 | 25 |
17929 | 장미의 계절 [10] | 황영호 | 2023.05.30 | 81 |
» | 시루떡 <심영자> [12] | 이태영 | 2023.05.29 | 177 |
17927 | 자유freedom ~벗어나는것 [4] | 최종봉 | 2023.05.29 | 55 |
17926 | 비 오는날의 서울 대공원 [12] | 이은영 | 2023.05.29 | 67 |
17925 | 2014년 서유럽 여행기, 스페인 편 - 모로코 Tangier 당일 여행 [1] | 박일선 | 2023.05.28 | 22 |
17924 | 마음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2] | 김필규 | 2023.05.28 | 102 |
17923 | 세계의 가장 놀라운 조각상 TOP 10 [1] | 김필규 | 2023.05.27 | 80 |
17922 | 산우회 분당 중앙공원 산책 [3] | 정지우 | 2023.05.26 | 81 |
17921 | 꿈이 현실로… ‘우주 G7′ 됐다 [4] | 엄창섭 | 2023.05.26 | 88 |
17920 | 2014년 서유럽 여행기, 스페인 편 - Algeciras [2] | 박일선 | 2023.05.25 | 30 |
17919 | 몸의 소리 왈츠 <김영교 수필선집> [3] | 이태영 | 2023.05.24 | 100 |
17918 | 2014년 서유럽 여행기, 스페인 편 - Alhambra 궁전 [4] | 박일선 | 2023.05.23 | 39 |
2019년 10월 3일에 여기에 올라온 글이네요.
어쩐지 제목이 귀에 익어 찾아보았더니, 댓글이 수없이 많이 달린
아름다운 글입니다.
그때 올린 제 댓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 정말 심영자 모습 같은 깔끔하고 아름다운 글이구나.
"시루떡" 글감도 좋아. 누구나 좋아하는 팥 호박고지 시루떡.
우리 회보에도 이런 좋은 글 많이 올려 줘.
글 잘 못 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원고 청탁하지 말고...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