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예던길' 따라 그림 속으로
2021.04.25 11:19
묵향 깃든 靑山에 한 걸음 들어서니 나도 ‘녀던길’ 따라가네
[Travel 아트로드]경북 안동 글 사진 전승훈기자
퇴계 이황선생이 청량산을 가던 낙동강 변의 '예던길'
《조선의 성리학자였던 퇴계 이황(1501∼1570)은 ‘물러남’의 미학을 추구했다. 평생 140차례 벼슬이 주어졌지만 사직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은 것이 79차례였고, 나아간 61차례마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의 호인 ‘퇴계(退溪)’는 시냇가로 물러난다는 뜻이다. 그는 고향인 경북 안동에 도산서당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내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善人多) 세상’을 만드는 것을 평생 꿈꿨다. 이러한 퇴계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고 있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2박 3일간 숙박하며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76)과함께 따뜻한 사람 향기로 가득 찬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걸었다.》
○ 퇴계의 ‘예던길’ 따라 그림 속으로
퇴계의 제자인 성재 금란수가 지은 정자인 '고산정' 주변 풍경
퇴계는 도산서원에서 15km가량 떨어진 청량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했다.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칭할 정도였다. 15세 때 숙부와 처음 오른 것으로 시작해 모두 6차례 청량산을 찾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퇴계가 마지막으로 청량산에 오른 것은 63세 되던 1564년. 새벽부터 밥을 먹고 출발한 퇴계는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내살미마을인 천사(川沙)에 도착했다. 안개 낀 산봉우리에 물결은 출렁이고, 새벽하늘은 곧 동이 트려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인 벽오 이문량(1498∼1581)이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때 퇴계는 나귀를 몰고 출발하면서 유명한 시를 남긴다. ‘나 먼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先入畵圖中)!’ ‘예던길’은 퇴계가 청량산에 가던 낙동강변 4∼5km 구간의 길이다. 은빛 물결 주변에 펼쳐지는 학소대, 농암종택, 고산정의 수려한 풍경은 퇴계의 ‘그림 속(畵圖中)’이란 표현처럼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 ‘산(山)태극, 수(水)태극’이란 말처럼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도 S자로 굽이친다. 단천교 앞에는 ‘녀던길’이 새겨진 돌이 있다. 퇴계가 지은 시조 ‘도산십이곡’에 나오는 ‘녀던길’은 옛 성현이 가던 길이라는 뜻이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칸트, 괴테, 헤겔이 걸으며 사색하던 ‘철학자의 길’에 비견되는 이 길은 조선의 선비들이 거닐며 사색하던 인문학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예던길을 걷다 보면 강 한가운데에 서 있는 바위를 만난다. 퇴계가 ‘경암(景巖)’이란 시로 읊은 바위다. 그는 거센 물결 속에서도 천년 동안 변함없는 바위를 보며, 시류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의 ‘부평초’ 같은 인생을 성찰한다.
○새벽에 걷는 퇴계 명상길
퇴계가 직접 설계한 '도산서당'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의 아침은 오전 5시 반 ‘퇴계명상길’ 산책으로 시작한다. 퇴계 선생의 집이 있던 한서암에서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도산서원까지 오가는 1.5km 남짓한 산길이다. 이슬을 머금은 새벽 공기가 감도는 초록빛 세상에는 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퇴계의 ‘도산십이곡’을 낮게 읊조리며 걷다 보니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2019년 도산서원을 포함한 9개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다른 서원들이 대부분 학자의 사후에 지어진 것과 달리, 이곳엔 퇴계가 직접 설계해 짓고 10여 년간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도산서당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 마루 한 칸의 소박한 건물이다. 담장은 곳곳이 뚫려 있고, 나무를 엉성하게 얽은 사립문이 손님을 맞는다. 현판은 퇴계가 직접 썼다. 세로로 기둥에 달린 현판 글씨가 무척 작고, 유머러스하다. ‘산(山)’ 자는 뾰족뾰족한 그림으로 표현됐고, ‘서(書)’ 자에는 새가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60대의 퇴계 선생은 아무리 어린 제자라도 사립문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고 한다.
안동의 명물인 헛제사밥 한상 차림
○후손에게 전해진 퇴계의 인간미
퇴계 16대종손 이근필 옹이 무릎 꿇고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퇴계가 대학자를 넘어 성현(聖賢)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남녀, 신분 차별을 넘어서 모든 생명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실천한 삶 때문이다. 퇴계 종택과 태실, 묘소 등을 찾다보면 엄하기만 할 줄 알았던 퇴계의 인간미를 느끼게 된다. 퇴계의 묘소 밑에는 맏며느리의 무덤이 있다.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퇴계는 한양에서 벼슬살이할 때도 며느리가 버선, 옷을 지어서 보내면 반드시 편지와 함께 참빗, 바늘 등을 답례품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한 평소 병약했던 맏며느리를 위해 약재를 손수 지어 보내기도 했다. 이렇듯 다정다감했던 시아버지 밑에 자신을 꼭 묻어달라고 며느리가 유언을 했다고 한다.
시인 이육사의 고향인 원촌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윷판대
글·사진 안동=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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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던길' 예던길' 낯설지만 정답게 들리는 길 이름입니다.
퇴계를 다시 읽으니 안동의 도산서원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퇴계가 대학자를 넘어 성현(聖賢)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남녀, 신분 차별을 넘어서 모든 생명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실천한 삶 때문이다.'
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