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사청 페이스북

평범해지고 싶다. 아니, 그냥 평범하게 평범해서는 안 된다. ‘특별하게’ 그리고 ‘격하게’ 평범해지고 싶다. 일, 직업, 꿈, 욕망, 의식주, 소비, 여가, 취미, 놀이, 일상에 이르기까지…. 마치 평범하지 않은 건 다른 길을 들어선 것처럼. 

평범함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의 트렌드가 진화하고 확장하고 있다. 이른바 ‘노멀 크러시’다. ‘Normal’(보통의)+‘Crush’(반하다)다. 남보다 앞서 출세하거나, 튀거나, 화려하려 하지 않고, 사치스럽고 자극적인 것을 거부하고 ‘보통스럽게’ 사는 데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돈, 명예, 출세, 성공, 권력? 이런 건 아재들의 구닥다리 가르침이다. 나만의 기준에 맞춰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내가 만족하는 삶을 선택하겠다!  

21세기에 찾아온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선비정신일까. 특별해지기가 너무 어렵고 힘든 세상이다 보니, 그냥 평범함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자구책일까. 요즘의 젊은이들은 진심으로 평범해지고 싶은 것일까. 정말로 잘 먹고, 잘 나가고, 잘 살고 싶지 않은 것일까. 

# 워라밸이 우선이다
요즘 여러 기관이 일과 여가에 대한 젊은 층의 가치관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대체로 ‘성공적 미래를 위한 몰입보다 현재의 일상과 여유가 더 중요하다’는 취지의 대답이 그 반대보다 더 많다. 도전과 야망은 더 이상 젊음의 빛나는 훈장이 아니라는 듯이. 

이른바 ‘워라밸’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말하는 ‘Work and Life Balance’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팀이 작년 말에 펴낸 ‘트렌드코리아 2018’이라는 책에 등장하면서 이 용어는 시대의 가치처럼 돼버렸다. 이 책에 함께 소개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라는 신조어와 함께. 연봉은 다소 적더라도, 뒤통수에 꽂히는 상사의 눈총보다 저녁이 있는 삶을 원한다. 회사형 인간으로만 살아온 구세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 ‘놈코어’를 입는다
어른들은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놈코어(normcore)는 ‘Normal’+‘Hardcore’다. 평범하지만 핵심이 있다는 거다. 요즘 대세인 패션 용어다. 기능적이고 편안한,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평범함을 표방하지만 포인트는 있는 패션 스타일이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입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패션 트렌드다. 

2013년 뉴욕의 트렌드 전망기관인 케이홀이 놈코어를 새로운 경향으로 제안하면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 놈코어 룩의 전형은 터틀넥과 청바지의 고 스티브 잡스다. 영국 모델 알렉사 청은 놈코어 패션의 아이콘이다. 드레스에 그냥 스니커즈를 신거나 무심한 듯 찢어진 청바지에 테일러드 재킷을 걸치는 식이다. 놈코어룩은 지난해 파자마 패션으로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헤어스타일에도 놈코어라는 말이 붙었다. 자고 일어난 듯 내추럴한 분위기의 웨이브펌 스타일이다.

# 청담동 홍대앞은 가라
변두리 취급을 받던 성수동, 망원동, 익선동, 샤로수길(서울대입구역 주변)이 젊음의 양지가 될 줄이야. 요즘 트렌드를 좀 안다는 2030세대의 마음은 청담동, 명동, 홍대앞을 떠났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모던한 분위기, 북적대는 인파가 싫어진 것이다. 새로 뜬 곳들의 공통적 풍경은 평범하고 다소 촌스런 옛 동네의 분위기다. 골목길의 작은 책방에서 책을 읽고, 테이블 몇 개 없는 소박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술집 대신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신다. 개성 있는 점포들이 들어서며 이곳도 북적댄다. 로데오거리, 가로수길, 삼청동이 인파에 밀려났듯이 이곳도 언젠가는 외면당하겠지만 지금은 핫 플레이스다. 

ⓒ tvN

# 짠내 나는 이야기가 좋다
tvN에서 일전에 방영한 ‘혼술남녀’는 자극적 스토리도 없었지만 시청률이 꽤 높았다. ‘윤식당’ ‘효리네 민박’ ‘나 혼자 산다’ ‘식사를 합시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뜬다. 소소한 일상의 풍경이나 팍팍한 현실을 그린 것들이다. 재벌 2세(나중에 알고 보니)와 사랑에 빠지는 신데렐라 판타지는 더 이상 청춘남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노량진 공시족이 상징하듯 희망이 요원한 세대에게는 소설이 아닌 ‘짠내’ 나는 리얼리티가 더 와 닿는다. 

매년 벚꽃이 피면 음원 차트를 휩쓸던 버스커버스커의 사랑의 노래 ‘벚꽃엔딩’도 10cm의 ‘봄이 좋냐’에게 1위 자리를 내줬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는 이렇게 바뀌었다. ‘꽃이 언제 피는지 그딴 게 뭐가 중요한데…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벚꽃이 그렇게도 예쁘디 바보들아, 결국 꽃잎은 떨어지지, 니네도 떨어져라…’
삼포 세대 솔로들은 행복을 강요하는 봄, 대책 없는 봄을 저주한다. 그들에겐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현실적이다.

ⓒ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 무자극의 자극, 의미 없는 것의 의미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쌈채소, 물 컵을 꽉 쥔 손, 더워서 열어놓은 문, 지하철역 스피커, 회전하는 선풍기,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 햇볕을 받고 있는 벽돌….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콘텐츠 연구소’가 올리는 이미지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시시하고 평범하다.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독하며 열광하고 있다. 책도 나왔다. 2017년 6월에 오픈한 지 3주 만에 1만 명의 팬을 모았다. 

지극히 짧고 수식어가 없고 무미건조한 코멘트와 사진을 올릴 뿐이다. 젊은이들은 이런 사진을 보며 힐링이 된다고 말한다. 만든 이는 20대 후반의 청년이다. 자극의 끝은 무자극이다.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장난에 관심을 쏟고, 시간을 투자한다. 액체 괴물, 일명 슬라임이다. 끈적이고 말랑한 점액질 형태의 장난감을 주물럭거리는 촉감, 소리를 즐긴다. 유튜버 ‘츄팝’이 업로드한 슬라임 제작 영상은 조회 수 300만을 금세 넘겼다. 슬라임을 직접 만드는 놀이도 유행이다. 슬라임은 이제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청춘의 장남감이 됐다. 소리로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 ‘ASMR’ (자율감각 쾌락반응)도 비슷하다. 어른들은 이해 못 할 것이다.

#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매주 1회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올라가는 ‘사소한 인터뷰’. 사소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것이다. 페이스북 팔로워만 1만 명이 넘는다. 2013년부터 시작해 인터뷰가 200편이 넘었다. 만든 이는 기자나 작가도 아니고, 영리 목적도 아니다. 그냥 의기투합한 몇몇 젊은이들이 만든 콘텐츠일 뿐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그냥 어쨌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백수나 직장을 가진 평범한 요즘 청년들이다. 그들의 고민, 희망, 행복, 에피소드들이 짠내 나게 진솔하게 다가온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각자 자신만의 답이 있다, 위대함의 시작은 사소함이다, 라고 말한다. 

화려한 경력과 스펙을 가진 유명인사의 처세술 강의나 성공담 강의도 예전처럼 인기가 높지 않다. 요즘 청춘들은 나와 비슷한 보통의 사람이 겪은 경험담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위로받는다.  

질풍노도의 세대는 사실 ‘평범’과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벌써부터 마치 링에서 내려온 복서처럼 평범한 인생, 소박한 여가, 무자극, 보통사람의 이야기를 추구할까. 

전문가들은 극심한 경쟁사회에 대한 피로감의 산물이라고 해석한다. 이해가 되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노력과 재능만으로는 신분상승이 구조적으로 어렵게 된 사회현실 속에서 그들은 힘들다. 고스펙이 화려한 성공을 보장해주지도 못 한다. 그러니 많은 젊은이들이 삶의 공식을 바꾸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반영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평범한 삶을 추구한다 해서 대충 되는 대로 살자고 하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삶일지라도 스스로가 자존감과 만족감을 잃지는 않는 것이다. 

노멀 크러시의 트렌드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궁금하다. 청년들 앞에 놓인 힘든 상황이 나아지면 좀 달라질까. 평범함에 대한 동경이 타율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정 삶과 행복에 대한 치열한 성찰의 결과라면 좋겠다. 그런 트렌드는 오래 가도 좋다.

 

한기봉 칼럼니스트 (hkb821072@naver.com)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홍보기획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