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함께하는 부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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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면 다 그런 거야
2009.05.0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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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사실입니다. 혹시 그럴 수도 있는 사실인지 모르지만 서글프게 느껴지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야, 너 지금 어디쯤 오니?"
"나 지금 막 출발해서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중이야."
"뭐? 지금 몇시인데 이제 내려와?"
"8시 20분인데 왜 그래?"
"기차 출발이 8시 29분인데 이제 나오면 어떻게 해?"
"우리 기차 출발이 9시 29분인데 무슨 소리야?"
"....? 아, 참 그렇구나. 내가 그만 깜빡해서 너무 일찍 나왔네."
"너 벌써 치매 걸렸니?"
어제 인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김영종과 약속한 시간은 언제나처럼 9시 29분, 정말 깜빡한 모양입니다.
대전역에서 만나 핀잔을 주고 김영종은 7호차로 나는 11호 차로 들어갔습니다.
열차 안은 빈 자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내 자리 11c에 어떤 젊은 여자가 엎드려 잠이 들었습니다.
"여보세요. 자기 자리로 가세요."
"여기 내 자리 맞거든요."
잠에서 깨어난 아가씨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대들듯이 노려봅니다.
"아니, 내 자리입니다. 아가씨 기차표 좀 봅시다."
나는 당당하게 인터넷으로 출력한 내 기차표를 보여주며 다시 한번 엄포를 놓았습니다.
아가씨도 당당하게 역에서 구입한 기차표를 보여줍니다. 아니? 똑같이 11호차 11c 아닌가?
이때 아가씨가 빼앗듯이 내 표를 잡아채더니 단호하게 나를 조소하듯 미소를 짓습니다.
"할아버지 표는 9시 29분 차가 아니라 8시 29분 거네요."
"......?"
아차, 내가 인터넷에서 잘못 눌러 한 시간 앞선 표를 끊었던 것입니다.
몇 차례 미안하다고 꾸벅꾸벅 사과를 하고 열차 반장에게 부탁해서 오승(誤昇) 확인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실수지만 내가 확실히 늙었다는 생각에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차에서 내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 사실을 김영종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심하게 핀잔을 줄 줄 알았던 김영종이 빙긋이 웃으며 너그럽게 넘겨 버립니다.
"늙으면 다 그런 거야."
늙으면 다 그래? 늙으면 다 그래? 늙으면 다 그래? 늙으면 다 그래?
수없이 되뇌이면서 부정해 보려 했지만 역시 늙으면 다 그런 모양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전철 안에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김영종이 아침에 전복죽을 먹었다고 합니다. 또 한번 웃었습니다.
사실 나도 아침에 영종이와 같은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전복죽울 먹었거든요.
이른 아침이라 밥맛이 없어 평소의 빵과 치즈, 햄, 커피를 제쳐놓고 말입니다.
댓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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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2009.05.0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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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2009.05.07 18:30
걱정마세요... 진짜 늙어서 문제 생긴 사람은
이렇게 잘 쓴 웃기는 글을 올릴 수 없지 않겠어요? -
이문구
2009.05.07 18:30
너무 많이 웃다니요?
나는 그 생각하면 아직도 진땀이 나는데... -
임효제
2009.05.07 18:30
하`
솔직히 털어 노셨습니다.
그래도 그만하니 천만 다행(?)입니다요. 하 하 하 하 하 하 . . . . -
이문구
2009.05.07 18:30
솔직히 안 털어 놨다가는 나중에 김영종에게
호되게 얻어맞을 가능성이 있거든요. -
황영자
2009.05.07 18:30
늙으면 다 그래요.ㅎㅎㅎㅎㅎㅎㅎㅎ
안그런 사람있으면 나와 보라하세요.
그 행폰 멋지네요.
난 사진을 찍긴 하는데 컴과 연결을 했는데 뭔 프로그램을 깔아야 한다며 아들 녀석 깔아 줄 생각을 안해서 사진 못 올립니다.
어휴 속 상해. -
이문구
2009.05.07 18:30
요즘 핸드폰은 프로그램 없이도 연결이 됩니다.
핸드폰과 컴을 연결시킨 다음 [내컴퓨터]를 열어 보세요.
혹시 핸드폰이 또 하나의 하드 드라이브로 뜨면 거기에서
사진울 옮겨오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면 됩니다. -
김숙자
2009.05.07 18:30
교수님 글이 정말 실감이 납니다
저런 경험 한번쯤은 다 했을 겁니다
늙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너그럽습니다
그리고 위안을 주고 받습니다. -
심재범
2009.05.07 18:30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너무 심한 이야기인가?
나도 언젠가는 그런 수모를 당할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적당히 살다 가야지 그런꼴 당하기 전에 ㅋㅋㅋㅋ -
이정란
2009.05.07 18:30
하하하하 저도 기차표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몇년 후배와 대전가는 길이었는데. 역무원이 빈자리일텐데 우리가 앉아있어서 표를 보자고.
핸폰 성능이 디카만 하네요? 그럴수도 있군요. 정말 현장을 정확히 잡겠어요. -
이문구
2009.05.07 18:30
가입비 3만원만 지급하기로 하고 무료로 교환한 핸드폰입니다.
지상파 TV와 500만 화소의 카메라 성능을 가졌다나요.
그런데 아무래도 디카 성능을 못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
전준영
2009.05.07 18:30
이교수 우리 나이가 이젠 70년 살았으니 그럴 만도하지 아가씨가 자기 아버지 생각해서 봐주웠나 보이 항상 인사회에 온다고 멀리서 열심히 참가 해주니 더욱 반갑다네 항상 건강하기를 기원한다네 이번바꾼 핸드폰 사진이 선명히 잘 찍히는 군 불초 늙은이를 멋있게 잘찍어 주워 고맙다네 감사... -
김승자
2009.05.07 18:30
그만하면 준수하게 늙어 가는것 아닙니까?
핸드폰 딕카에, 콤에, 장거리 출근(출교?)에
게다가 그날의 일과를 차근 차근 고백할 수 있는 맑은 정신(양심?),
그나 그뿐인가, 은은히 깔린 sense of humor를 담은 글을 쓰실 수 있으니
벗과 함께 나들이 다니며 늙어 가는것 서러워 할 까닭이 없네요.
재자의 밝은 모습 보여 주시니 더 더구나 반갑습니다. -
김세환
2009.05.07 18:30
문구야, 누구나 이따금 실수를하지. 늙은것과는 관계없는 일이야. 공연히 "늙으면" 하지마라. -
이문구
2009.05.07 18:30
여러 친구들의 격려에 용기를 얻습니다. 친구들 말처럼
[늙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
[늙어서 그래도 별 일 아니다]
[이런 고백을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멀쩡한(?) 정신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면서 힘든 하루를 마감합니다.
사실은 감기, 몸살 증세로 오늘은 수영도 못가고 약 먹고
끙끙 앓다가 일어났거든요.
이제 좀 정신이 듭니다. -
이문구
2009.05.07 18:30
너무 겁주지 마시라요.
동네 병원을 통해 약국에서 조제한 약을 먹었더니
정신이 말끔하니 이젠 괜찮겠지요. -
김동연
2009.05.07 18:30
신종 flu 아닌가요? 보건소에 신고하시지요.ㅎ.ㅎ. -
박창옥
2009.05.07 18:30
아 그런 재미있는 일이 있었네요.
그건 늙어서가 아니라 감기 때문일겁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글과 사진을 올리시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우리 모두 건강하게 즐겁게 삽시다. -
이문구
2009.05.07 18:30
아! 맞아.
감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내가 늙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말입니다.
변명도 이쯤되면 치매에 접어드는 게 확실하지요? -
김영종
2009.05.07 18:30
유구무언 이긴 한데 무얼 자랑이라고 ㅎㅎㅎ -
정해철
2009.05.07 18:30
코스코에 전복죽이 있어요?
우리가 늙기는 늑ㄹ었지요.
전철에서 아들 데리고있는 30대 아가씨가 자리를 양보하니까. -
김영종
2009.05.07 18:30
전복죽이 있어 문구 형님께서 몇번을 맛있다길래
한번 사와 보았드니 너무 물컹 거린것이 내 취미는 아니였수
(전복은 많이 있기는 하우)
배도 고프고 / 빵한쪽이 더 든든하요 -
김진혁
2009.05.07 18:30
또 그런일이 생길 친구가 없나 생각하고 있습니다.웃고 싶어서... 물론 나도 예외가 될수는 없겠지요.
다 자연스런 현상이니 받아드려야 건강에 좋는거라고 결론 지었지요.
핸드폰 사진 잘 나오네요. 난 영 무거워서 전번것만 못하거든요. -
권오경
2009.05.07 18:30
차근차근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시니 참 대단하십니다. 늙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은걸요..
초롱초롱 젊은 사부님이십니다..
하하하..요 며칠에 전 저의 이야기도 있지요.
여권 재발급 땜에 종로구청을 가는데..
" 똑똑한 척하고 3호선보다 5호선이 더 가깝고 낫지, 암~!" 하고는.. 착각이 착각을 낳고..생긴일.
진땀을 빼고.. 어휴~한심한 나.
그 때 구청에서 찍은 '번개여권사진' 을 보고 난 아이들이 냅다 깔깔깔~~
나중 일은 말로 해야함다. . 웃으워서..하하하..사진은 거짓말을 안하더군요. -
이문구
2009.05.07 18:30
요즘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차, 실수하기 쉽습니다.
젊은애들에게 늙은이라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인상을
주기가 싫은데 그게 그리 쉽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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