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출간

아들과 남편을 잇따라 저 세상으로 보냈다.
이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문학인생 30주년을 맞아
2000년 출간된 단행본
『박완서 문학의 길찾기』(세계사)에 실린 글
‘나의 삶, 나의 문학: 왜 사냐고 물으면…’에서
그런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역설적으로 삶을 갈구한 그의 육성이
실린 대목을 전한다.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미소하고 속절없는 것들한테 마음
붙이려 드는 것은,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해서가 아닐까.
이렇듯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건만도 역시 죽음은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따라 죽고 싶어 몸부림치던 때가
엊그저께 같건만도 따라 죽고 싶은 비통과 절망의 극치가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릴 것을 생각하면
인생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배반감을 느낀다.
어찌 고통뿐이랴, 내 마음속에 영원처럼 각인된
사랑의 순간,
그것 때문에 태어난 양 믿어 의심치 않던
삶의 비의도 결국은
소멸하는 것과 운명을 같이하게 될 것을 어떻게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죽는 것은 몸일 뿐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다 만날 수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먼저 간 사람과 같은
곳으로 간다는 건 아마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곳이 허(虛)든, 무(無)든,
신의 섭리든 간에 그곳으로 비상을 하든지,
추락을 하든지, 빨려들든지 할 것이다. 설사 그 순간에
우레와 같은 깨달음이나 쾌감이 예비돼 있다고 해도,
느낀 것을 기억하고 표현할 수 있는 육신이 없는
대오각성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죽음이 무서운 것은 기억의 집인 육신이 소멸한다는 절대로
변경될 수 없는 사실 때문이고, 내가 육신에 집착하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영혼이 있으면
뭐 하나, 육신이 없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알아보나 싶어서다.
육신에 대한 찬탄 없는 첫사랑의 기쁨을 말한다면
그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다.
서로 끌리고 사랑하여 결혼한 남자에 대해
내가 그 사람에게 첫눈에 반한 건 근육질의 몸이 아니라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이었노라고 말할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 눈빛, 그 미소가 아니었다면 그런 좋은 심성이
무슨 수로 겉으로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눈빛도 미소도
육신에 속한 게 아니던가.
내 속으로 난 자식도 마찬가지다. 그의 몸이 생겨날 때 나는
게울 것 같은 이물감을 느꼈고,
점점 부풀어 심장까지 차오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죽을 힘을 다해
내 몸으로부터 떼어냈다.
내 몸의 진액을 짜내어도 짜 내어도 고 작은 것은
허기져 했고,
날마다 포동포동 살이 찌는 내 새끼를 내 손으로 씻기면서
날로 굳세고 아름다워지는 몸을 보면서 느낀
사랑의 기쁨을 무엇에 비길까.
그런 내 새끼 중의 하나가 봄의 절정처럼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이 세상에서 돌연 사라졌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나도 곧 뒤따라가게 될 테고,
가면 만날 걸,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만나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건 포옹도 오열도 아니다.
때려주고 싶다. 요놈, 요 나쁜 놈,
뭐가 급해서 에미를 앞질러갔냐 응?
그렇게 나무라면서 내 손바닥으로 그의 종아리를
철썩철썩 때려주고 싶다.
내 손바닥만 아프고 그는 조금도 안 아파하고
싱글댈 것이다.
나는 내 손바닥의 아픔으로 그의 청동기둥
같은 종아리를 확인하고 싶다.
나는 내 새끼들을 때려 기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심하게 때린 기억이 몇 번 있다.
밖에 나가 놀고 있으려니 한 아이가
끼니 때가 지나도 안 돌아오고, 동네방네 찾아나서 보니
동무들은 다 집에 있는데 그 애만 안 보인다.
해는 져서 어둡고 온갖 방정맞은 생각으로 마음속이 지옥이
돼 있을 때, 그 애의 모습이 저만치 보인다. 실루엣만으로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게 바로 피붙이의 징그러움이다.
달려가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오냐고
다짜고짜 때리기부터 한다.
내 손바닥의 아픔으로 내 새끼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타들어 가던 애간장이 스르르 녹게 된다.
저 세상에서 내 새끼와 다시 만날 때도
그러고 싶은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엑스터시 상태를 경험한다.
그러나 최고의 엑스터시도 육신을 통하지 않고는
이를 수 없는 걸 어이하리….”
2011.02.0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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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사님의 훌륭한 문학적 소양이 없었다면 이런 글을 접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크게 감사 드립니다.
어제는 매월 첫월요일 점심때 열리는 11회 태평회가 인사동 선천옥에서 열렸읍니다.
이문우회장님과 카나다에서 서울까지 날라온 김필규동문이 먼저간 전종국, 이광훈 두동문의
명복을 우리와같이 간절히 기원하였읍니다.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더니 봄비를 재촉하는양 끄므래한 날씨도 참석자들의 마음을 무겁게하였읍니다.
생과 사, 생즉필멸등의 깊은 뜻은 예나 지금이나 몰랐고 고 박완서씨의 피붙이얘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지만
막걸리 몇잔하니 고인들과 대작하던때 "봄비 내리는 주막의 임자없는 술잔아"를 읊던 생각에 시울이 이상해져
얼른 작별인사를 하고 황급히 집에 오니 사방이 조용하더군요.
"유레카!" 이것이구나! 아무리 피할려해도 피할수없는 고독과 죽음인것 같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