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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부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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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한편

2010.05.25 16:27

오세윤 조회 수:362

 



 

 



 

맷돌




   주인석




  눈이 보살이다. 친정 뒷마당 응달에 측은하게 머리를 박고 있는 맷돌을 발견했다. 박박 얽은 피부에는 집 밖에 산 고생의 흔적으로 이끼가 군데군데 나 있다. 음식 한 번 제대로 못 얻어먹어 그런지 아가리에는 백태처럼 흙이 끼었다.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아랫돌과 윗돌이 껴안고 있는 모습이 왠지 사람 같아 가엾기 그지없다. 비가 올 때마다 튀어 오른 흙덩이가 곰보자국에 붙었고 거기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이끼가 뿌리를 내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전을 폈다. 편리한 믹스기를 두고 쓸데없는 짓 한다며 어머니는 잔사설이 많았지만 그런 소리보다 내 마음이 더 앞섰다. 어머니에게 구경만 하시라 큰소리치며 옛날 기억을 떠올려 남편과 나는 어설픈 두부 만들기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에 맷돌로 곡물 가는 것을 많이 봤었다. 그 중에서도 콩을 갈아 만든 두부는 일품이었다. 두부 맛이란 암맷돌과 수맷돌의 수많은 충돌과 마찰이 만들어내 화해의 맛이다. 부대끼며 돌아가는 맷돌에서 여유와 인정을 볼 수 있다.

 

 어머니는 불린 콩을 맷돌 옆으로 가져다 놓는다. 큰 함지박 위에 가지가 벌어진 나무를 걸치고 수맷돌을 놓고 수쇠에 잘 맞추어 암맷돌을 끼운다. 준비가 끝나면 암맷돌의 아가리로 콩을 한 줌씩 넣고 갈기 시작한다.

 맷돌을 가운데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주 앉아 어처구니를 잡고 돌리신다. 마치 암맷돌과 수맷돌이 안고 돌듯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맷돌을 사이에 두고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여덟 식구가 먹을 콩을 다 갈 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신다. 부모님의 이야기가 도란도란하면 맷돌은 드르륵드르륵 장단을 맞춘다.

 

 맷돌을 가만히 보면 아래쪽의 수맷돌은 고정된 상태로 앉아 있다. 수맷돌의 뾰족 튀어나온 수쇠에 암맷돌은 걸려서 빙빙 돌아간다. 맷돌과 부모님은 참 많이 닮았다. 가만히 앉아 계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 주는 아버지는 아랫돌 같고 말 많고 싹싹한 어머니는 윗돌 같다.

 콩을 갈면서도 주로 어머니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아버지는 느긋하게 들어 주는 쪽이었다. 맷돌의 아가리로 콩이 들어가 빙빙 돌면서 비벼 갈아내는 것과 같다.

 

 부모님의 맷돌은 콩만 가는 것이 아니다. 콩도 갈고 당신들의 삶도 조곤조곤 갈아 내셨다. 한 해에도 수차례 곡물을 갈아 내며 당신들의 애환과 갈등도 가셨던 것이다. 딱딱한 덩어리들이 암맷돌의 아가리를 통해 들어가면 수맷돌은 묵묵히 받아 주었다.

 어쩌다 삶이 삐거덕거릴 때 어머니의 잔소리가 종일 계속되어도 아버지는 가만히 받아들이셨다. 그러다가 아가리를 통해 들어온 콩이 덜 가리고 함지박에 빠지듯 부모님도 한 번씩 심하게 다투셨다. 그때마다 다시 콩을 주워 아가리에 넣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맷돌을 돌렸을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여섯 자식을 키우면서 얼마나 갈아 낼 것이 많았을까. 말이 없는 아버지와 잔정 많아 말도 많은 어머니 사이엔 갈 것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 물에 물 탄 듯 싱거운 아버지와 여간 짭짤하지 않은 어머니가 안고 돌아가면서 수도 없이 덜커덩거렸을 것이다.

 갈기가 끝나면 가마솥에다 걸쭉한 콩 액을 넣고 푹 끓인다. 솥에서 술술 나는 구수한 냄새와 맛은 마찰이 주는 선물이고 걸쭉한 국물은 당신들이 일구어 낸 끈적끈적한 삶의 모습인 것이다.

 

 남편과 나는 부모님처럼 도란도란이 아니라 왁자그르르하다. 서로 잘한다고 혼자서 어처구니를 돌리려 하는 것이며, 갈리기도 전에 콩을 넣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옆에서 보다 못한 어머니가 도와서 겨우 흉내만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 우리는 이가 잘 맞지 않는 맷돌이다. 안고 같이 돌기보다는 각각 돌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그러니 부대낌에서 화해로 가기보다 공회전을 힘만 뺄 때가 더 많다. 마음을 맞추고 나면 갈아 낼 것이 지천일 게다.

 

 날마다 머리 굵어지고 영악해져 가는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일, 위아래로 눌린 중년의 어깨에 얹힌 짐을 함께 들어 주는 일이나 각박해진 세상인심에도 따뜻하게 살아가려면 둘이 안고 돌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딱딱한 콩을 걸쭉한 국물로 만들어 부드러운 두부로 내기까지 마찰이라는 통과의례를 수도 없이 거쳐 왔던 부모님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하리라.

 맷돌이 돌면서 마찰을 일으켜야 제 기능을 하는 것처럼 사람도 사람들끼리 가정과 사회 속에서 비비면서 살 때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 충돌이야 없지 않겠지만 후에 돌아보면 그것이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평생을 끌어안고 슬근대며 산 부모님은 아직도 갈 것이 남았을까. 아흔의 나이에도 한 번씩 톡탁거리다 화해한다. 당신들의 삶을 보면 우리네 삶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행복의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갈 것 없어 조용한 빈 맷돌보다 콩이 이리 튀고 저리 튀어도 날마다 드르륵거리는 맷돌이 보기에 좋다. 단번에 갈아 버리는 믹스기보다 맷돌로 슬근슬근 갈아낸 것이 훨씬 구수한 맛이 나다. 우리 삶도 이와 같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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