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함께하는 부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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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다시 보기-2
2010.07.19 10:45
○ 이러한 기록 중에 지 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 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
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
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
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
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
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
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
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
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
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
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 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
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
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
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
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되었냐
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
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
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
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
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
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
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
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
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
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
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
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
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
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
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
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
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
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
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
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 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
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
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 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
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
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
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 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
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
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
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
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
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
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코 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
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
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
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 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
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
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
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
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 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
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
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
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
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
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
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
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
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
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
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
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
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
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
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
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
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
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
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
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
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
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
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
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
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
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
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
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
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
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 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
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
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 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
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
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
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
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
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
니까?
다 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
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
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
으로 가는데 고뢰(鼓擂)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鼓擂, 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
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
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
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
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
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
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
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
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
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
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
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
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
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
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
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
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
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
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
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
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
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
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
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
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
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
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
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
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
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
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
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
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
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
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
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
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
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
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
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
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
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
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
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
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
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
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
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
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
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
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
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
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
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
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
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
’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
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
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 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
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
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
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
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
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
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
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
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
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
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 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
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
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
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
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되었냐
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
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
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
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
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
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
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
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
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
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
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
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
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
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
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
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
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
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
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
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 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
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
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 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
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
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
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 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
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
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
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
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
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
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코 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
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
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
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 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
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
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
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
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 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
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
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
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
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
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
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
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
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
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
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
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
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
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
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
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
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
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
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
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
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
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
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
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
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
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
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
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
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
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 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
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
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 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
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
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
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
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
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
니까?
다 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
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
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
으로 가는데 고뢰(鼓擂)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鼓擂, 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
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
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
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
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
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
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
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
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
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
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
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
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
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
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
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
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
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
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
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
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
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
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
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
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
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
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
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
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
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
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
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
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
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
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
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
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
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
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
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
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
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
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
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
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
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
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
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
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
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
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
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
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
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
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
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
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
’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
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
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4
-
임효제
2010.07.19 10:45
-
김영길
2010.07.19 10:45
필규형, 재미있게 읽었읍니다.
결론을 듣고 보니 그 rational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pragmatic한
점에 문제점이 있는듯합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해결 할려면
좀더 sick하면서 지혜롭게 해결책을
모색 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pragmatic한 면이 충족되지 않는한
아무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의 작은 매부는 변호사 였읍니다.
돈을 잘 벌었고 잘 살았읍니다. 그
형님이 김원용박사였읍니다. 그분은
고고학에 학자중에 학자 였지요.
그러나 두분은 서로 잘 어울리지
못했고 pragmatic한 점에서 항상
갈등이 있는 것을 옆에서 보았지요.
참고로 몇자 적었읍니다. 계속 정진
하시기 바랍니다. -
김필규
2010.07.19 10:45
영길형,
알고보면 우리 주변에 각 분야 별로 훌륭한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특히 젊은 분들 중에서
우리의 國學(역사 언어 풍속 신앙등)을 연구하여 제 나름대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옛날의 임금이나 학문이 높았던 선비들이 주고받은
초서(草書, 行書를 더 풀어 흘려 쓴 글씨)로 쓰여진 간찰(簡札, 편지)을 번역하여 현대인이
알아보기 쉽게 출간한 분들은 돈이 되지않는 작업을 대를 이어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하는
계속하고 있는 고마운 젊은 학자들입니다.
우리의 역사책은 해방후 최고 대가로 뽑히던 분(이른은 않 밝힘)의 사견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양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바 간혹 새로운 해석에서 신선한 깨우침을 받을 때는
마냥 즐겁기도 합니다.
위의 글을 홈피에 올린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있지않고 이러한 해석도 있으니 심심파적으로
읽어 보시라는 뜻입니다.
삼불 김원용(三佛, 金元龍) 선생님은 제가 몹시존경했던 분으로 高裕燮, 崔淳雨의
뒤를 이은 최고의 고고학자며 미술사학자 이십니다. 특히 그의 문인화는 직업화가의 수준을
뛰어 넘었다는 평을 받았지요. 성미가 급하시고 너무 솔직하셔서 부담을 받은 사람들도 주위에
있엇으나. 집안에 훌륭한 분이 계셨읍니다. -
김영은
2010.07.19 10:45
해박한 지식과 투철한 역사 의식에 경탄합니다.
정독을 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에 놀라고 있습니다.
공학도는 아니지만, 한문을 전공한 친구 딸이 "국학연구원"에서
승정원 일기 같은 조선시대 역사물을 번역 하는데,그 양이 어마어마하게
방대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았습니다만, 역사는 계속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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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과학 수학 천문 지리 등등..
이조 500년 사로 부터 시작해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세세히 이야기 해서 공부 잘 했습니다.
매우 자랑스러운 글입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늙은이(?)는..
허성도 교수의 글이 연설문으로는 적절해도
글로 읽기에는 좀 긴 느낌이 와유 ..?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