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컴퓨터 인생 얘기 - "무작정 귀국"
2010.08.11 12:21
제가 지금 한국에 살고 있게 된 연유에 관한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더 나이가 들어서 거동이 불편해 질 때는 미국 자식들 곁으로 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내년에는 한국 국적도 회복할 생각으로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는 흔치 않은 2중국적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대학 졸업 후 외교관이 되는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1996년에 “무작정 미국유학”을 갔습니다. 정확히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갔습니다. 미국유학을 가는 사람들이 보통 얘기하는 것처럼 박사학위를 따가지고 귀국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경영석사, 전자공학, 통계학, 컴퓨터공학 공부를 전전하다가 미국 컴퓨터 회사에 취직하게 되어서 30여 년간의 컴퓨터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LA에 있던 미국에서 제일 큰 System Integration 회사인 Computer Sciences Corporation에 (한국의 SDS 같은) 취직해서 소프트웨어 개발 일을 하면서 10년을 보내다 보니 진력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는 일이 미국 은행이나 정부를 상대로 프로그램 개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타 주립대학 동창 황규빈 형이 세운 텔레비데오라는 회사에 동참하게 되어서 샌호세로 이사를 갔습니다. 한국과 오가며 사업을 하고 있는 황규빈과 같이 일을 하면 한국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텔레비데오 사에서 7년 동안 일하면서 한국에도 몇 번 왔다가고 서류상이었지만 “백만장자”도 되어보고 당시 미국 컴퓨터 업계의 이름난 사람들과 교제도 하면서 (빌 게이츠를 포함해서) 신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인내심이 부족한 성격이라 (타고 난 것 같습니다) 텔레비데오에서 7년이 되니 또 진력이 났습니다. 당분간 일 안 하고 먹을 돈도 있겠다 컴퓨터 공학 박사학위 공부를 해서 대학교수로 제2의 인생을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당시 1986년) 복잡한 캘리포니아를 떠나서 조용히 공부하기 좋은 유타로 가족을 끌고 돌아와서 유타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타대학은 Computer Graphics 기술을 탄생시킨 곳으로 유명해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포토샵으로 유명한 아도비 회사의 Computer Graphics의 기술은 모두 유타대학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의 기반이었던 텔레비데오 사의 주식의 폭락으로 공부를 포기하게 되고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산호세롤 돌아가지 않고 유타에 있던 노벨이라는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유타는 미국에서 제일 큰 소프트웨어 회사 5개 가운데 둘이 있을 정도로 소프트웨어 산업이 발달해서 제2의 실리컨 밸리로 알려졌던 곳이었습니다. 노벨은 당시 세계 PC 넷워킹 시장의 80%를 점유해서 (1980년대 후기 - 1990년대 전기) 잘 나가던 회사로 IBM,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하던 회사였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1990년 중반기에 마이크로소프트에 당하는가 싶더니 인터넷이 나오면서 노벨과 마이크로소프트의 PC 넷워킹 기술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노벨에서는 날리던 Product Manager였습니다. Product Manager란 “제품 관리자”로 번역할 수 있는데 회사의 한 제품을 담당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는 컴퓨터 회사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직책입니다. Mini-CEO라고도 불립니다. 애플 회사를 세우고 세계적인 회사로 키운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는 제가 보기에는 세계 최고의 경영자라기보다는 세계 최고의 Product Manager입니다. 그는 후세에 경영자보다는 애플의 주요 상품인 맥인토시, 아이팟, 아이폰, 아이팻의 창시자로 (다시 말해서 Product Manager) 알려질 것입니다. 제가 노벨에서 만들었던 제품은 노벨을 다음 10년 동안 먹여 살릴 제품으로 불릴 정도로 성공적인 제품이었습니다 (이름은 NetWare Lite). 그러나 회사 세력다툼에서 제품을 다른 사람에게 뺐기고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경쟁연구를 (Competitive Analyst) 하는 한직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때가 1994년이었고 노벨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있었더라면 아마 그곳에서 은퇴해서 지금 유타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쩐지 다른 미국회사를 찾아보기는 싫었고 한국에 나가서 일해보고 싶은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그래서 그해 여름에 2주 휴가를 얻어서 한국에 나와서 한국에 나올 수 있을까 하고 사정을 알아봤습니다 (안산에 있던 김영종 형 회사를 찾아간 것도 그때). 결론은 박사학위나 특허가 없으면 한국에 발붙이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에 (1995년) 30년 전에 “무작정 미국유학”을 갔던 것과 비슷하게 노벨에 사표를 내고 “무작정 귀국”을 감행했습니다. 귀국해서 여기저기 문을 두들겨봤으나 역시 예상대로 열려지는 문은 없었습니다. 거의 포기 상태에서 노벨의 한국지사에 인사차 갔는데 당시 지사장을 맡고 있던 친구가 (유타 본사에 한번 와서 만났던) 노벨 한국지사에 나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면서 고문으로 일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그런 기적적인 연유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거의 4년 동안을 노벨 한국지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상임고문으로 나중에는 (고문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한국노벨 부사장으로 일했습니다. 주로 기술마케팅과 (technical marketing) 노벨 본사 연락관계 일을 했습니다. 한국 직장문화를 체험하고 한국을 다시 배우고 그동안 소원했던 한국 친구들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던 귀중한 4년이었습니다. 만용에 가까운 “무작정 귀국”과 4년 동안의 이 한국생활이 없었더라면 지금 한국에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한국에 인터넷을 들여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안목이 짧아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당시 노벨에서 가깝게 같이 일하던 한 동료가 인터넷의 중요성을 회사 경영진에 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경영진은 (HP 출신의) 이 친구의 제의를 묵살했습니다. 그때 비슷한 일이 마이크로소프트에도 일어났는데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빌게이츠는 인터넷의 중요성을 금방 이해하고 인터넷으로 돌았습니다. 그 전환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후에 노벨 경영진이 인터넷의 중요성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을 때였습니다. 노벨 경영진에 제의를 묵살당한 이 친구는 노벨을 떠나서 자기 회사를 세워서 당시 유타에서는 최초로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자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도 노벨을 떠나서 “무작정 귀국”을 하기 전에 이 친구 회사를 방문했는데 내가 원하면 한국에 웹사이트를 만드는 작업을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인터넷 이해가 부족해서 이 친구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때 인터넷에 대한 (1994년) 이해가 좀 있고 사업하는 머리가 좀 있었더라면 (사업하는 머리는 그때도 지금도 없습니다) 한국 최초의 웹사이트를 구축하고 다움이나 네이버 같은 회사를 시작할 수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공상을 해봅니다.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났었더라면 지금 같이 세계 배낭여행도 못하고 마라톤도 못 뛰어봤을 것이니 어느 쪽이 더 나은 인생인지 판단이 잘 안 갑니다. 인생은 정말 “새옹지마”인가 봅니다. Copyright (c) 2004- By 박일선. All Rights Reserved. 이 글과 사진은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수정하지 않고 저작자를 박일선으로 (혹은 Elson Park) 표시하는 조건으로 아무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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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선
2010.08.1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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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2010.08.11 12:21
참 많은 경험을 하셨군요.
그래도 지금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얻었으니 성공한 삶입니다.
작은 회사나 단체에서는 아직도 박일선님같은
인터넷전문인이 필요한 곳이 많을 겁니다.
한국에 오셔서 봉사하는 쪽으로 일거리를
찾아 보시면 많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영종
2010.08.11 12:21
그래 그게 94 년이 었든가
부인과 같이 우리 회사의 방에서 한국에 돌아와 살기위한
이것저것 알아 보든때가 ㅎㅎㅎ
그때 적극 찬성 하면서도 이곳 기업 문화가 많이 변하였음을 상의 하였지
그래도 지금의 박일선이가 삶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것 아닐까
난 자네가 부러운것이 한둘이 아닐쎄만 다른 친구들도 비슷 하리라 보네 ...... -
박일선
2010.08.11 12:21
그때 참 자네가 존경스럽게 보였다네.
한국 산업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진정한 애국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거기에 비하면 나는 미국에 가서 쉽게 살다가
다 늦게 나타나서 무엇을 한다고 이러나 하는 자책감도 있었고.
다 옛날 얘기가 되었네. -
이정란
2010.08.11 12:21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지금 같이 세계 배낭여행도 못하고 마라톤도 못 뛰어봤을'
글을 읽어가면서 제 머리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끝에 가서 그 말이 나오네요.
결과적으로 잘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넘 부러운 성공적인 삶을 누리고 계십니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자꾸 옛날 얘기를...' 저도 옛날 이야기 읽기가 흥미있습니다.
신기할정도로 일찍 컴퓨터를 접하셨습니다. 설명해도 못알아듣겠지만 그 당시의 컴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권오경
2010.08.11 12:21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멋진 생활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나 큰 보물이지요!!
꼬불꼬불~이 자리까지 걸어 온 길은 바로 오늘이 있게 한 안내자네요. -
최경희
2010.08.11 12:21
무엇이 인생의 성공인지 아직도 모르지만
일선씨는 사회경험도 많이 싸았고 가정도 가족도 성공적이고,
하고 싶은일들 다~아하고 일선씨의 인생은 대 성공이 아닐까요 .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
김승자
2010.08.11 12:21
어느 씨스템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꿈을 쫒아 지나 온 편력이
변화 무쌍하면서도 화려합니다.
무지개를 쫒아 헤매다 피로한 몸을 쉬며 언덕에 앉았을 때
멀리 마을끝에 무지개가 솟아 오르는 곳을 바라보니
자기의 집 뒷뜰이더라는 어느 유롭의 시가 생각나게 하시는 글,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게 즐거운 여행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빨리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
김영길
2010.08.11 12:21
김성우동문한테 들은 얘기인데
유타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다고
그런데 여름방학이면 김성우는
라스베가스에 가서 일해 돈좀
벌어다가 썼는데 너는 어느 농장
에서 일하면서 돈도 못 벌고 고생
만 하고 돌아 왔다던데 그말이
사실이라면 너의 고지식 한면이
오늘의 너를 있게 한것이 아닐가? -
박일선
2010.08.11 12:21
1966년 마국 유학 첫해 여름
어떻게 하다보니 남가주 Santa Barbara에 있는 오렌지 농장에서
멕시코에서 온 농부들 틈에 끼어서 오렌지를 따는 일하게 되었는데
하루 벌이가 (piece 제라) 고작 $5,
거기서 하루 숙박비 $2.50을 제하면 $2.50 남는데
3주 간 하다보니 이래선 다음 9개월 학비 벌기는 틀린 것이라
버스를 타고 라스베가스 같이 도박장이 있는 Lake Tahoe에 가서
하루 밤 모텔에서 자고 나니 3주 동안 오렌지 타서 번 돈이 다 날라갔느데
그래도 남은 3개월 동안 Lake Tahoe 도박장에서 하루에 16시간 씩 일을 하고 나니 (일주 7일)
여름 방학이 끝나고 유타 학교로 돌아갈 때는
9개월 학비 $1300을 모았더라.
미국에서 돈 없어서 대학 못 간다는 소리는 게으른 사람들의 헛소리더라. -
하기용
2010.08.11 12:21
* 졸업후 어찌 어찌하여 소원대로 외교관이 되었더라면
2~3년 마다 여기 공사 저기 대사로 가족들과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며 어디 지금처럼 배낭을 매고 혼자
세계를 주름잡고 가고 싶은데를 맘대로 갈 수 있을까 ? -
임효제
2010.08.11 12:21
감명 깊게 읽었다오.
꿈 같은 인생의 파노라마 이군요.
이 글을 읽으면서..
박형께서 큰 물에 놀던 세월이 자랑스럽다고 생각 했지요.
옛날 1964년경 같은데.. 박형이 한때 을지로 2가 사무실 짠돌이 홍원표 사장의
"근신 산업" 본사에 잠시 근무 할 때... 나하고 홍호섭이가 마포 새우젓 동네
같은 회사 공장 사무실에 근무 할때가 생각나네.
그 시절 박형은 미국인과 영어에 아주 능통하다고 회사에서 소문 났더라고.
거기 무역 부장으로 계시던 이대종에게 당시에 들었네.
그 때 외무부 쪽으로 줄이 닿았으면, 또 다른 반기문이 나 왔을지 모르지요. ㅎㅎ
이제 돈을 벌고 못 버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고..
지금은 인생을 즐기면서.. 건강하게 세계 일주를 다니고..
하니.. 또 다른 행복이라 생각 해 봐요.
참~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간사라고.. 어찌하리...??? ^^ ^^ -
박일선
2010.08.11 12:21
근신산업에 잠깐 다닐 때 생각이 아련히 나네.
그때 그집에 이대 다니던 예쁜 딸이 있었지. -
연흥숙
2010.08.11 12:21
살아오신 이야기 단숨에 읽기가 아까웠어요.
우리가 박일선씨를 옆에서 보고 사는 것도 참 힘든과정을 거쳐서군요
그러나 뜻하는 일을 성취하셨으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항상 다른 곳으로
전진하신 그 추진력, 용기 보통사람은 하기 힘든 노력이셨네요. 존경합니다. -
이기정
2010.08.11 12:21
안 간 쪽의 길엔 언제나 미련이 있는 남는 법이나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으니 참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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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있어서 나가지도 못하고
숙소 방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자꾸 옛날 얘기를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