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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부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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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만년필

2011.06.04 08:45

오세윤 조회 수:186











녹색 만년필 

 

 건망증이 심해졌다. 현관을 나섰다가도 바로 되돌 쳐 들어와 벨을 누르기 일쑤다. 한번이면 양호하다. 어떤 땐 세 번까지도 되풀이한다.


(웨이브 클립) <진품명품>은 왜 볼까. 둘 다 3·8따라지 출신이라 집에는 진품명품이 될 만한 것도 없고, 그걸 구해 보관할 재력도 소양도 없으면서 매번 꼬박꼬박 시청하는 그 저의를 나는 도시 가늠을 못한다. 오메가 시계라던가 ‘구찌 백’ 따위는 아예 있어본 적도 없는 집, 모를 사람. 


 <진품명품>앞에 앉은 아내를 속으로 웃으며 집을 나서다 나는 건망증에도 잊혀 지지 않는 옛 기억 하나를 언뜻 떠올린다. 어마지두 환갑이 된 늙은 기억.







 1950년 6월, 나는 중학생이 됐다. 집에서 가까운 명문 서울중학교를 낙방하고 들어간 양정은 나름대로 이름 있는 학교였지만 통학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걸어서 근 40분이 걸렸다. 5학년 때 앓은 늑막염과 고질적인 배앓이로 그 무렵 나의 건강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등하교를 함께 하는 영내가 자주 가방을 들어 줄 정도로 내 몸은 형편없이 약해져있었다.


 입학 3주째 화요일 체육시간, 아침부터 배탈이 난 나는 지난주처럼 그 시간을 나무그늘에 앉아 땅바닥에 벗어 놓은 아이들의 옷 더미를 지키며 쉬고 있었다.


 체조를 끝낸 아이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축구를 했다. 공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언가가 옷들 사이에서 반짝 눈을 부시게 하는 게 있었다. 끌리듯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아이의 벗어놓은 윗도리 주머니에 꽂힌 샤프펜슬 뚜껑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빼내 살펴봤다. 녹색의 날렵한 몸통과 은도금한 뚜껑, 얼떨결에 바지주머니에 잽싸게 집어넣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가슴이 콩 튀듯 뛰었다. 숨이 가빠지면서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더럭 겁이 났다. 안될 일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면 잃어버린 아이는 바로 담임선생님에게 일러바칠 거고, 옷을 감시하고 있던 내가 제일 먼저 의심을 받을 건 빤한 일. 가방이고 주머니고  모두 철저히 조사할 게 아닌가. 어머니가 불려오고 아버지한테는 또 얼마나 혼이 날까. 심하면 정학, 아니 퇴학을 당할지도 몰라. 훔칠 일이 못되었다. 주머니에서 샤프를 꺼내 도로 제자리에 꽂아놓고 그늘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 눈엔 녀석의 샤프만 자꾸자꾸 눈에 밟혔다. 금요일 점심시간에 싸온 녀석의 도시락을 보자 흑심이 다시 발동했다. 쇠고기 장조림과 계란말이, 공연히 심통이 났다. ‘그래, 내 기필코 다음 체육시간엔 고놈의 샤프를 쌔비고 말테다!’ 속으로 오달지게 다짐했다.


 토요일 하교 길에서도 어떻게 훔칠까를 궁리하면서 오느라 영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6월 25일 일요일,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동네 아이들과 형무소 앞 전차종점에 나갔다. 다른 날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어른들이 큰길 상점 앞에 웅기중기 모여 서서 굳은 표정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에 귀들을 모았다. 새벽에 옹진반도로부터 인민군이 쳐들어왔다는 뉴스가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처음에 사람들은 늘 쌍 38선에서 일어나는 국지적 분쟁으로 또 그러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계속 같은 뉴스가 연달아 나오자 그제야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근심스럽게 수군대며 서둘러 골목 안으로 뿔뿔이 사라졌다. 오후에 들어서자 거리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팽팽한 긴장감이 분초마다 부풀어 올랐다.


 26일 월요일, 일찍 서둘러 학교엘 갔다. 반나마 결석한 교실은 분위기마저 어수선했다. 첫째시간인 국어시간에도 멀리서 쿵쿵 포성이 울려왔다. 둘째 시간 도중 담임선생님이 들어와 우리들보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무기휴학이라고 말씀했다. 영내와 함께 바로 집으로 왔다. 독립문을 지나 전차종점에 이르는 동안 무악재로부터 이불보따리와 솥단지와 아이들을 실은 소달구지들이 열개도 넘게 지나갔다. 오후가 되면서 달구지들은 점점 더 그 수가 늘어났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기어이 녀석의 샤프를 훔쳤다. 이상하게도 나는 검은 동복을 입고 있었다. 우선 화장실 뒤 벽 아래 얕게 흙을 파고 감췄다. 풀들이 제법 자라있어 감춰두기 십상이었다. 방과 후 우물쭈물 시간을 보내다 아이들이 모두 교문을 빠져나간 걸 확인한 뒤 가서 찾아내 안주머니 깊숙이 넣어가지고 왔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교문을 나서기까지도 누가 자꾸 뒤에서 부를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식은땀마저 흘렀다.






 무사히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집안에서조차 감추기가 만만치 않았다. 쓰자니 어머니나 동생한테 들킬까 염려됐고, 갖고 다니자니 영내가 알까 두려웠다. 들키면 그땐 정말 도둑놈으로 확실하게 낙인찍힐게 아닌가. 벽장속도 책상속도,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훔쳐오긴 했지만 감출수도 쓸 수도 없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마루 밑에 들어가 땅을 파고 감추는 참에 아버지가 내는 기침소리에 놀라 화들짝 잠이 깼다. 요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그리고 그 새벽, 인민군이 서울을 접수했다. 세상이 바뀌었다. 6·25는 내게서 모든 것을, 도둑이 될 기회마저도 앗아갔다. 나의 ‘훔치기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대학의 합격발표가 있던 날, 아버지로부터 녹색 파커만년필과 샤프펜슬 한 쌍을 선물로 받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샤프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만년필만 남아 나와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상기도 TV앞에 돌부처로 앉아있는 아내, 건망증이 더 심해지기 전에 오늘 나갔다 오면 무언가 손때 묻은 물건 하나쯤 찾아 챙겨놔야 하겠다.


 훗날, 딸에게 아내와 나를 기억할 <진품명품?>이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필통에 꽂힌 만년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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