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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에 축복을

2011.06.25 08:51

오세윤 조회 수:209






 



도시락 4화






 


 손녀 돌보기 어느새 석 달, 방학이 되어 좀 놓일까 했더니 오히려 일거리 하나가 더 늘었다. 도시락 싸기. 방학시작 다 다음 날로 바로 시작되는 학원수업이 아침 9시 반부터 저녁 7시까지라 도시락을 지참해야 한단다. 1년 내 힘들게 공부한 아이를 좀 쉬게 할 양으로 예약해 놨던 남도여행도 취소해야했다. 마음준비부터 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펄쩍 뛴다. 도시락반찬 챙기기가 그리 쉬운 줄 아냐고, 전업주부도 힘들어 학교급식을 고마워하는 판에 할아버지가 할 일이 못된다고 걱정 겸 겁을 준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데다 피할 일도 아니어서 우선 보온밥통부터 샀다. 점심시간이 겨우 25분밖에 안되는데다 구내식당도 없고 인근엔 학생신분으로 이용할만한 만만한 음식점도 없어 어차피 도시락을 싸가야 할밖에 없었다.


 구시렁대던 것과는 달리 아내는 반찬을 골고루 준비해 날랐다. 게다가 석 달 동안 아내에게서 전수받은 실력도 제법 늘어 찬그릇 채우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멸치볶음, 두부 부침, 생선전, 콩자반, 장조림, 고등어· 꽁치 조림, 콩나물무침, 두부· 김치볶음 따위를 번갈아 담아줬다.


 아이는 거의 남기는 것 없이 도시락을 싹싹 비워가지고 왔다. 다 같이 모여앉아 서로 뺏거니 주거니 먹는다는 점심시간 풍경을 아이는 저녁식탁에서 신나게 이야기했다. 방학이랍시고 놀지도, 잠 한번 푹 못자고 온종일 공부와 씨름 하는 아이가 짧은 점심시간을 그런대로 스트레스를 풀며 보낸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그래도 격일로 월·수·금만 준비하기 망정이지 날마다 하게 됐더라면 어쩔 뻔 했을까 생각하다가 불현듯 옛일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싸주던 도시락반찬은 한결같게 콩자반 아니면 깍두기였다. 광복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하한 초기의 서울살이는 매사가 어려웠다. 다섯 남매를 키우는 살림에다 나와 여동생, 아버지와 사촌형 것까지 매일 네 개씩 도시락을 싸야했던 어머니로선 달리 반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터.

 깍두기나 콩자반국물이 흘러 책과 가방을 붉게 검게 더럽히는 것이, 시큼하고 찝찔한 반찬냄새가 창피해 나는 도시락 갖고 가길 꽤나 싫어했다. 더구나 짝이던 기민이가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국물로 얼룩져 젖은 내 도시락보자기를 흘끔거리며 고개를 외로 꼬는 다음날엔 결단코 도시락을 앉은뱅이책상 밑에 숨겨두고 학교엘 갔다. 그런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귓불에다 한숨처럼 나직이 나무라셨다. “왜 또 안가지구 갔니.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중학교 때 하숙집 윗방 냉골에 앉아 공부하다 생긴 치질이 도져 수술을 받았다. 할 수없이 자취방을 나와 학교 앞에 하숙을 했다. 하지만 고약하게도, 하숙 첫날부터 배가 고팠다. 아침과 저녁도 그랬지만 도시락밥 양이 형편없이 적었다. 불면 날아갈 듯 밥알을 세워 담는 솜씨가 얼마나 날렵했던지 점심시간에 도시락뚜껑을 열어보면 반찬그릇에 밀려 밥이 반으로 줄어들어 있기가 한날처럼 똑 같았다. 더 달래도 마이동풍이었다. 그 하숙비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인원에 맞춰 밥을 짓기 때문에 더 줄 것도 없다고 했다.

 피란지 시골생활 6년 동안 늘어날 대로 늘어난, 영양실조 걸린 허기진 위에 하숙집 도시락은 숫제 고문이었다. 공부도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한 달 만에 다시 왕십리 자취방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그 토요일 하굣길에 신당동 중앙시장에 들러 2파운드짜리 마가린 한통을 사들고 들어가 친구와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비웠다. 다랍고 얍삽해라. 던적스럽고 사나워라. 사대문안 서울인심.

 

 피란살이 나의 열다섯살은 치질보다도 더 고약했다. 셋방살이 설움에 학교도 못 다니고, 점심도 없이 아침저녁 죽만 먹고, 허기진 배를 채울 무언가를 찾아 들녘을 쏘다니는 반 거지 신세였다. 겨울 들어 추워지면서는 땔감도 더 구해야했다. 스물 안팎의 동네청년들과 40리 떨어진 ‘한티 골’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할머니는 식구들의 죽을 좀 더 멀겋게 쑤고 당신 몫을 줄여 나에게 보리밥 도시락을 싸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지게를 받쳐놓고 점심을 먹으려 뚜껑을 열어본 도시락엔 밥 대신 중간크기의 고구마만 두개 들어있었다. 의아했다. 웬 고구말까. 가난한 동네라 인심도 박해 누가 가져다주지도 않았을 텐데······,그나마 보리쌀도 다 떨어진 걸까. 두 살 위의 안집 아들이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엊저녁 어머니가 장 봐오신 거라 둘러대 어줍게나마 상황을 얼버무렸다. 그날따라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엔 땅거미가 더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웬 고구마야, 누가 갖다 줬어?”

 소반에 얹힌 죽 그릇을 끌어당기며 할머니에게 여쭸다. 등잔불 따라 흔들리는 눈으로 할머니가 볼을 붉혔다. 잠시 망설이던 할머니가 내 눈길을 피하며 실토를 했다.

 “응, 말하긴 좀 뭐하다만········ 어제 키를 빌리러 안집엘 들어갔다가 아무도 없기에 윗방을 들여다봤지. 발(바자) 안에 고구마가······.”

 “두개만?”

 “그래.”

 “왜, 몇 개 더 꺼내 오시지 않구, 할머니도 먹게-.”

 대꾸 없이 물끄러미 등잔불을 쳐다보던 할머니가 좀 만에 나직이 말씀하셨다. “그건 죄야.”

 

 도시락이 조금이나마 카타르시스가 되어주는지 아이는 종일의 학원수업을 지루해하지 않고 잘 다니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내일은 도시락 걱정을 안 해도 되게 생겼다. 저녁에, 아내가 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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