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한때 후덕한 나라였습니다
2011.09.01 11:33
미국은 지금 경제를 비롯해서 문제투성이의 나라로 되고 있지만 한때는 매우 후덕한 나라였습니다. 제의 경험담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사람 영주권 비자 얻은 일 1970년 초 미국 영주권을 받자마자 회사에서 1개월 휴가를 내서 한국에 결혼식을 치르러 나왔습니다. 1966년 봄 유학길에 오른 후 첫 귀국길이었습니다. LA 공항을 출발해서 동경에서 1박하고 다음 날 아침 김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일본 땅은 짙은 초록색이었는데 일본을 지나고 조금 후에 나타난 한국 땅은 황량한 황토색이었습니다. 잘사는 나라 일본, 가난에 찌든 나라 한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다행이 1983년인가 두 번째 귀국길에는 한국 땅도 짙은 초록색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슬픈 쇼크였고 두 번째는 기쁜 쇼크였습니다.
얘기가 좀 옆으로 샜는데 그렇게 귀국을 해서 약혼식, 결혼식을 치루고 꿈같은 한 달이 지나고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왔습니다. 당시는 저 같이 경우에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혼자 미국으로 돌아가서 배우자 영주권 비자 수속을 하면 3개월 정도 후에 비자가 나와서 미국으로 오는 식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처가에 그렇게 설명을 하고 혼자 떠나려 했더니 처가에서 강력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3개월이 걸려도 한국에서 수속을 해서 함께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혼자 떠난 다음에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보통 큰일이 아니란 걱정과 나중에 집사람 혼자 가는 경우가 되어도 도중에 비행기를 놓치든지 해서 국제미아가 될 수 있겠다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특히 노인들에게는, 외국 가는 것은 거의 달나라 가는 것 같이 생각이 되던 때였으니 그런 걱정이 생길만도 했던 것입니다.
저는 보통 난감해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 어디 가서 물어볼 데도 없고 아무런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오랜 궁리 끝에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에서 알아볼 곳은 단 한 군데 미국 대사관 밖에 없으니 미국 대사관에 가서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인 직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영사를 만나서 상의를 해봐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 직원을 통하면 일이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 대사관은 지금 롯데 호텔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미국 대사관에 찾아가서 비자 업무를 보는 영사관 사무실로 갔습니다. 당시 영사과 사무실은 지금 은행 구조를 가졌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운터 뒤에 외부 손님을 상대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앉아 있고 그 뒤에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한국인 직원들이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제일 뒤에 미국인 영사 방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사무실을 한번 휘둘러 본 후에 카운터 옆으로 난 직원들이 사용하는 나지막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앞만 보고 영사들 방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하고 한국인 직원에게 제지당할 것을 각오했는데 카운터 앞에 앉아있던 한국 직원들, 그 뒤 책상에 앉아있던 한국인 직원들,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를 처다 보는 직원조차 없었습니다.
영사들 방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 문이 반쯤 열린 한 방을 들여다보니 젊은 미국인 영사가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Excuse me."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서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사정 얘기를 했습니다. 금방 결혼 했는데 나는 미 공군 ”top secret" 프로젝트 일을 하고 있어서 (사실이었다) 곧 돌아가야 하는데 처가에서 혼자는 못 돌아가게 하니 배우자와 함께 가도록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내 얘기를 경청하던 이 영사는 책상 서랍을 열고 서류를 하나 꺼내서 보더니 이번 달 영주권 비자 쿼터에 여유가 있다면서 미 국무성에 당장 연락을 해서 비자를 받아 놓을 테니 일주일 후에 여권과 건강진단서를 가져오면 비자를 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일이 쉽게 풀린 것입니다. 영사 방을 나오면서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이 황홀한 기분이었습니다.
다음 며칠 동안 이사람 저사람 도움을 받아가면서 집사람 여권을 내고 (당시 외무부에 근무하던 대학 동창들에게 밥을 샀습니다) 신체검사 서류를 만든 다음 일주일 후에 대사관으로 갔습니다. 전번처럼 카운터 옆문을 열고 들어가서 영사 방으로 걸어갔습니다. 역시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한국인 직원들의 제지를 받는 문제는 없는데 영사가 자리에 없으면 어떻게 하나, 영사를 만났는데 본국 국무성에서 비자를 못 얻었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 영사 방문을 노크하니 일을 하고 있던 영사가 얼굴을 쳐들고 나를 보더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기면서 어제 본국 국무성으로부터 집사람 비자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자를 받고 회사에 연락해서 휴가를 한 달을 더 받고 한국에서 마음 놓고 푹 쉰 다음에 집사람과 함께 미국엘 갔습니다. 처가에서 얼마나 좋아 하던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그렇게 쉽게 배우자 영주권을 받은 예는 매우 드믈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것은 저를 도와준 영사에게 제대로 사례를 못한 것입니다. 비자만 달랑 받고 “Thank you." 한 마디만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에게 인간적으로 대해 준 영사에게 저는 인간적으로 대해 주질 못한 것 같아서 너무 후회가 됩니다. 그 영사도 지금은 노인이 되었겠지요.
작은 아들 대학 수업료 보조 받은 일
1997년인가 1998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고 큰 아들과 딸은 유타 의대에 다닐 때인데 그 애들은 저희 명의로 은행 융자를 받아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고 있어서 저희 보조는 받지 않았습니다. 반면 작은 아들은 미국 동부에 있는 비싼 사립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일부 장학금을 받고 나머지 학비와 생활비는 저희가 한국에서 송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IMF 사태가 생기면서 통상 800대 1이었던 달러 환율이 갑자기 1,800 대 1로 치솟았습니다. 당시 수업료가 년 2만 불 정도였는데 (지금은 5만 불, 맙소사) 매해 두 번에 나누어서 냈는데 갑자기 송금액이 배 이상으로 뛰게 된 것이었습니다. 보통 난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한국에 대학 수업료 문제 때문에 야단인데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 친구님들 가운데도 당시에 저 같은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대학에 편지를 썼습니다. 한국의 IMF 사태 설명을 하고 수업료 보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보조를 해주면 다행이고 안 해주면 1,800 대 1 환율이라도 송금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IMF 상태는 세계 각국 매스컴에서도 보도를 해서 학교에서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는 장학금 금액을 올리고 제가 송금해야할 금액을 줄여서 1,800대 1 환율로 송금을 해도 800 대 1 환율로 송금하던 때와 저의 부담이 동일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만 도와주었는지 여러 학기 도와주었는지는 지금 기억은 안 나는데 당시 위기를 넘기게 해준 것은 틀림없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 사이에 편지 한 장으로 마음을 통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푸근하게 느껴졌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를 도와준 일
1973년으로 기억합니다. LA 공항 근처 El Segundo라는 도시에 직장이 있어서 그 근처 아파트 생활을 2, 3년 하다가 처음으로 LA 근교 Anaheim이라는 도시에 미국에서는 콘도라고 부르는 집을 사서 이사를 갔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마 연립주택이라고 부르는).
아파트에 살 때는 살림이 별로 없어서 한 아파트에서 다른 아파트로 이사 갈 때는 내 차로 몇 번 옮기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콘도로 이사 갈 때는 애들도 둘이나 생기고 가구도 생겨서 내 차 하나로 이사를 하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그때는 이삿짐센터를 알아볼 생각도 안했던 것 같은데 그런 데가 있는 지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다행이 직장 친구들이 알고 도와주어서 이사를 쉽게 했는데 한 친구가 자기 트럭인지 빌려온 트럭인지 소형 트럭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가능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 일을 하는 친구들이 작업복을 입고 짐을 나르는 장면은 지금 생각하면 좀 안쓰럽게 생각이 듭니다. 그때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사를 도와주었던 직장 친구들 Doug Cook, Tom Coble, Rick Martin, Kathy Saunders 등, 이름도 잊히지 않는 이 친구들을 찾아보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Copyright (c) 2004- By 박일선. All Rights Reserved. 이 글과 사진은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글과 사진을 수정하지 않고 저작자를 박일선으로 (혹은 Elson Park) 표시하는 조건으로 아무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댓글 8
-
이정란
2011.09.01 11:33
-
김승자
2011.09.01 11:33
"두드려라, 그러면 열리리라!"는 글을 환경정리한다고
교실벽에 써 붙쳐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의 인격을 믿어 주는 사회에서 있는 일이지요. -
김동연
2011.09.01 11:33
1966년부터 미국 동부에서 좀 살던때 감동 받았던
미국사람들의 태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나도
박일선씨처럼 감동 스토리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미국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인간적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당시 받은 좋은 인상으로 지금도 미국사람들을
나쁘게만은 보지 않습니다. -
연흥숙
2011.09.01 11:33
박일선씨, 사는 이야기가 재미있군요.
정성을 다하면 그 일에 대한 용기가 생긴다는 옛말이
적용되는 일화들이군요 (성측용).
아무래도 편지를 잘 쓰시는 비결이 있는 듯 싶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
최경희
2011.09.01 11:33
진실한 좋은 사람을 만나셨군요.
젊은 신랑 신부의 큰 행운이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그에게 갚는 것이겠지요. -
김영길
2011.09.01 11:33
박형 좋은글 잘 읽었읍니다.
그런 감사한일을 많이 격었지만
박형처럼 이렇게 자상하게 써보지는
못햇네. 미국사람들은 이사람을 내가
도와야 겟다고 마음에 들면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는 그런 힘이 잇는 것같아.
나도 장로의 신분이지만 미국사람들의
그런 점이 나에겐 너무나 부족하지.
또 좋은 글 기대하네. -
김호중
2011.09.01 11:33
국제테러집단, 전쟁으로 인한 경제부담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심이 좀 각박해진 느낌은 있습니다만,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미국인의 근본적인 인생관은 아직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고 부고USA 독자들도 보시라고 모셔갑니다. -
박일선
2011.09.01 11:33
후배님, 감사합니다.
번호 | 제목 | 이름 | 날짜 | 조회 수 |
---|---|---|---|---|
5035 | 등산(753) | 김세환 | 2011.09.02 | 125 |
5034 | 등산(752) | 김세환 | 2011.09.02 | 117 |
5033 | 제303회 금요 음악회 [4] | 김영종 | 2011.09.02 | 147 |
5032 | 등산(751) | 김세환 | 2011.09.02 | 119 |
5031 | lala - 진솔한 이야기 :몰입 ( flow ) 그리고 しがみつかない生き方 (매달리지 않는 생활방식) [7] | 최종봉 | 2011.09.02 | 203 |
5030 | 등산(750) | 김세환 | 2011.09.02 | 113 |
5029 | 등산(749) [1] | 김세환 | 2011.09.01 | 115 |
5028 | 엄무광 동창을 먼저 떠나 보내고 !! [13] | 전준영 | 2011.09.01 | 289 |
5027 | 엄무광씨 소천 [19] | 김승자 | 2011.09.01 | 287 |
» | 미국은 한때 후덕한 나라였습니다 [8] | 박일선 | 2011.09.01 | 173 |
5025 | 세계 140개 살기좋은 도시 중 서울은 58위를 차지하다 !! [8] | 전준영 | 2011.08.31 | 159 |
5024 | The First Of Autumn [9] | 김재자 | 2011.08.31 | 223 |
5023 | ▶ 인사회 모임 안내 110907 ◀ [7] | 인사회 | 2011.08.31 | 188 |
5022 | 튀니지 여행기 (1) 수도 Tunis [10] | 박일선 | 2011.08.30 | 149 |
5021 | 어제, Browsing note -15 / 사대부고 졸업 [13] | 김영종 | 2011.08.30 | 199 |
5020 | HURRICANE IRENE 이 지나가고 ........... [13] | 이초영 | 2011.08.30 | 200 |
5019 | 화랑유원지, 경기도미술관 [2] | 이문구 | 2011.08.29 | 223 |
5018 | ♡12선녀탕 | 홍승표 | 2011.08.28 | 160 |
5017 | 8월의 마지막 주말에는 | 김동연 | 2011.08.28 | 207 |
5016 | The Future Is Beautiful [8] | 김재자 | 2011.08.28 | 241 |
5015 | ★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소개합니다. ★ [4] | 이정란 | 2011.08.27 | 149 |
5014 | 제302 회 금요 음악회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협주곡 1번 [9] | 김영종 | 2011.08.26 | 167 |
5013 | 등산(748) [1] | 김세환 | 2011.08.26 | 104 |
5012 | 가자! 중앙아시아로 !! [1] | 전준영 | 2011.08.26 | 158 |
5011 | 'Desperado~ [5] | 김재자 | 2011.08.26 | 173 |
63년 졸업후에 등산을 많이했습니다.
그 때의 사진 배경은 누런 흙더미만 있는 산이었습니다.
어떤 산에서는 모래언덕을 좌악~ 신나게 미끌어져 내려왔던 기억도 있어요.
이젠 수종을 생각해야 한다지만 우선 푸르기만 한것도 감사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