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함께하는 부고인
  
함께하는 부고인
  

나의 마라톤 얘기 (1)

2011.09.16 16:49

박일선 조회 수:254








계기



 


내가 마라톤을 뛰게 된 계기는 나의 배낭여행과 관련이 있다. 나는 1999년 마라톤에 관해서 흥미가 생기기 전까지는 내가 마라톤을 뛴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라톤은 특별난 사람들이나 뛰는 것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군 복무를 하면서 우연히 내가 뜀뛰기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우연한 기회로 7사단 육상부에 들어가서 약 6개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함께 군대 생활을 했고 나보다 먼저 육상부에 들어간 이종영 동문의 소개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인데 이종영 동문은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언제 한번 물어 본다는 것이 아직도 못 물어봤다.



 


이종영 동문과 나는 소위 “나일론” 육상부원이었다. 당시 육상부에는 20여 명의 부원이 있었는데 나와 이종영 동문 외에도 7, 8 명 나이론 부원이 더 있었던 것 같다. 육상부에서는 나일론 부원을 휴가를 보내고 그들 앞으로 나오는 식량과 다른 보급품을 팔아서 운영비로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6개월 내내 휴가를 보냈던 것은 아니고 주위 눈치를 보면서 가끔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이론 부원들도 진짜 육상부 부원들과 함께 육상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내 100m 기록이 13초로 나왔다. 100m 기록이 13초면 선수 수준은 아니지만 제법 빠른 시간이었다.



 


그렇게 군대 육상부 생활을 하면서 뜀뛰기에 관한 흥미가 생겼던 것 같다. 당시 육상부를 책임지고 있던 20대 말, 30대 초의 “정중사”는 나중에 코롱 마라톤 코치가 되어서 황영조라는 한국 마라톤의 큰 별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혹시 나의 정중사와의 인연이 내가 마라톤을 뛰게 된 것에 어떤 영향을 미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그런 연유로 육상에 흥미는 가지게 되었지만 마라톤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9년 봄 중국 배낭여행을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마라톤에 관한 흥미가 생기게 되었다. 당시 신장성 투루판이라는 도시에서 택시를 대절해서 투루판 관광을 하게 되었는데 택시 대절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독일 여행객 두 명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들과 하루 종일 함께 관광을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마라톤 얘기가 나왔다. 자기네들은 마라톤을 뛰는데 주로 여행과 연계를 시켜서 뛴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매년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이들은 항상 함께 여행을 하는 여행 파트너였다) 여행하는 나라에서 마라톤을 뛰도록 계획을 짠다는 것이었다. 그때 중국 여행 동안에도 마라톤을 뛰었는지 물어본 기억이 없다.



 


그들은 4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한 친구는 깡마른 마라톤 선수 체격이었는데 다른 친구는 100kg 가까이 보이는 과체중 체격이었다. 아니 이렇게 과체중인 사람이 마라톤을 뛴다는 말인가?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뛴다는데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과체중인 사람이 마라톤을 뛸 수 있다면 나도 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도 한번 뛰어보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중국 배낭여행을 끝내고 그해 6월, 4년 동안의 한국 직장생활을 끝내고 미국 샌호세로 돌아가서 다시 미국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라톤 뛰는 것에 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Runner's World"란 뜀뛰기에 관한 월간 잡지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이 잡지를 읽으면서 마라톤에 관한 상식과 흥미가 급격히 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라톤을 뛰어봐야겠다는 계기가 생기게 되는 일이 생겼다. “Runner's World" 잡지에 70세 마라토너 여자에 관한 특집기사가 실렸는데 한국 여자였다. 그녀는 70세가 되면서 70대 미국 여자 마라토너로는 처음으로 4시간 이내로 뛰는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의 기록은 4시간 5분 정도였는데 그녀의 도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성공했을 것 같다. 그녀는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과 결혼해서 미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마라톤을 뛰는 남편의 끈질긴 권유로 50대 중반에 마라톤을 뛰기 시작했다. 만 70세 여자가 마라톤 4시간을 깨는데 도전하는데 당시 10년 이상 젊은 내가 마라톤을 못 뛸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한번 마라톤을 뛰어봐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첫 도전 샌디에고 마라톤은 실패



 


당장 마라톤 잡지에서 추천하는 “The Non-Runner's Marathon Trainer”란 마라톤 자습서를 사서 마라톤 훈련에 들어갔다. 미국 어느 2년제 대학에서 한 체육교수가 마라톤 강좌를 개설했는데 한 학기 동안 학생들에게 마라톤 훈련을 시키고 마라톤을 완주까지 시킨다는 강좌였다. 이 자습서는 이 강좌에 등록해서 마라톤 완주를 한 40대의 여자 학생이 체육교수와 함께 쓴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내 마라톤 코치로 삼고 약 5개월간의 훈련을 들어갔다. 2000년 1월에 열리는 샌디에고 마라톤 대회 등록도 마쳤다.


 



훈련 중간쯤에 마라톤 자습서 책에서 꼭 해보라고 하는 10km 경주를 뛰었다. 마라톤을 뛰기 전에 마라톤 대회 분위기를 미리 체험해보라는 이유에서였다. 샌호세 집 근처에서 열린 10km 경주 대회에 참가해서 뛰었는데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지각색의 유니폼을 입고 나온 수백 명의 남녀노소 선수들, 응원 나온 가족과 친지들, 분주하게 돌아가는 대회 임원들, 자원 봉사자들,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이는 축제 분위기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온 힘을 다해서 뛰어서 50여분 만에 골인을 했는데 일등 기록은 30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나는 1km에 5분 정도 속도로 뛴 셈이었는데 지금은 7분 정도에 뛰니 매우 빠르게 뛰었던 것이다.



 


첫째 달 훈련이 제일 힘들었었다. 너무 힘들어서 마라톤 훈련을 거의 포기할 뻔했었다. 첫째 달 훈련은 30분 동안 쉬지 않고 뛰는 것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첫째 달의 첫째 주는 5분 뛰고 5분 걷고를 3번 반복하는 훈련이었는데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5분 뛰고 나니 숨이 가빠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고 다리에 힘이 다 빠져서 금방 주저앉을 것 같았다.



 


첫날 훈련이 끝난 다음의 느낌은 “아, 마라톤은 역시 아무나 뛰는 것이 아니로구나. 나는 마라톤 체질이 아닌 모양이다.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 이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훈련이니 한 주는 끝낸 다음에 포기하자 하고 옛날 힘들었던 군대 생활을 생각하면서 간신히 첫째 주 훈련을 끝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힘든 것이 매일 조금씩 쉬어지는 것이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쉽고 그 다음 날은 전날보다 좀 더 쉽고, 이런 식이었다. 마라톤 훈련의 첫 비밀을 발견한 것이었다. 둘째 주에는 10분 뛰고 5분 걷고를 반복하고, 셋째 주에는 15분 뛰고 5분 걷고를 반복하고, 하는 식으로 훈련이 순풍에 돛단 식으로 수월하게 진행이 되어서 드디어 한 달 만에 쉬지 않고 30분을 뛰는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두 번째 달부터는 마라톤 자습서 책에 나온 대로 16주 훈련 일정에 돌입했다. 그리고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네 번째 달 훈련으로 접어들면서 문제가 생겼다. 다리에 통증이 시작된 것이었다. 뛰기 시작해서 20km 정도 지점까지는 아무렇지 않다가 그 다음부터 종다리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푹 쉰 다음에 다시 뛰어 봤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마라톤 경기 날은 다가오는데 마음이 초조해졌다. 해결책을 찾을 수 없어서 훈련 양을 줄여가면서 훈련을 계속하다가 경기 날이 당도해서 무거운 마음으로 경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결국 첫 번째 도전한 샌디에고 마라톤은 실패로 끝났다. 28km 지점에서 통증이 시작된 것이었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면서 30km 지점까지 갔으나 그 이상은 걷기도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기권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는 시간이 너무 늦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힘들게 절뚝거리면서 골인 지점을 향해서 걸어 가다가 큰 아들을 만났다. 응원 차 따라왔던 큰 아들이 골인지점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경기가 거의 끝나 가는데도 내가 안 나타나니 걱정이 되어서 나를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큰 아들의 부축을 받아서 간신히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던 골인지점에 당도했다. 나의 첫 번 마라톤 도전은 그렇게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첫 완주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 마라톤


 



마라톤은 역시 아무나 뛰는 것이 아닌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뛰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서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포기를 해도 한 번 정도는 더 도전을 해본 다음에 포기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20km 이상을 뛰어도 예상했던 통증이 나타나지 않았다. 전에는 20km 정도에서는 통증이 꼭 왔는데 이제는 왜 안 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반가운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마라톤을 뛸 생각을 먹고 2000년 10월에 열리는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 마라톤 경기에 등록을 하고 정식 훈련에 들어갔다. 왜 오하이오 주 컴럼버스 마라톤인가? 당시 딸과 사위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와 애크런 지역에서 수련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들도 나와 함께 뛰고 싶다고 해서 딸네 집에 들르기도 할 겸해서 딸네 집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에서 열리는 마라톤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해는 부고 11회 동창들이 만 60세 기념으로 미국 단체여행을 왔을 때였다. 남궁견 단장, 전준영 총무 인솔 아래 30여 명이 와서 샌프랜시스코, LA, 라스베거스, 플로리다 주 올랜도 관광을 했다. 나는 샌프랜시스코 지역에 사는 김청자 동문과 함께 샌프랜시스코 지역 관광 도우미 노릇을 했는데 샌프랜시스코 관광이 끝난 다음에 샌프랜시스코 공항에서 동창들과 헤어졌다. 동창들은 다음 여행지인 LA로 떠났고 나는 컬럼버스 마라톤을 뛰기 위해서 딸네 집이 있는 오하이오 주 애크런으로 떠났다. 나는 마라톤을 뛴 후에 플로리다 주 올란드 근처에 있는 엄무광 동문 집에서 동창들과 다시 합류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딸, 사위와 함께 컬럼버스 마라톤을 뛰었다. 아주 힘들게 뛴 마라톤이었다. 뛰기 전 날 무엇을 잘 못 먹었는지 마라톤을 뛰는데 설사가 나기 시작해서 뛰는 동안에 7번 정도는 길가 숲속 같은 곳으로 뛰어 들어가서 실례를 했다. 컬럼버스 시를 더럽히는 것 같아서 미안한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는 휴지가 떨어져서 끼고 뛰던 장갑을 사용했다. 내가 아주 아끼는 장갑이라 버리지 않고 뛰는데 응원 나왔던 큰 아들을 만나서 장갑을 건네주면서 보관해 달라고 했는데 마라톤이 끝난 다음에 달랬더니 냄새가 나서 버렸다며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장갑을 버리지 않고 자기에게 맡겼느냐고 오히려 나를 나무랬다. 나는 없어진 장갑이 아까워서 속이 쓰렸는데. 



 


중간에 너무 힘들어져서 샌디에고 마라톤처럼 또 실패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적마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실패하면 플로리다에 가서 동창들 얼굴을 어떻게 대하나 하는 것이었다. 가족들 얼굴을 대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는데 동창들 얼굴을 대하는 것은 큰 문제로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뛰었다. 아마 동창들 생각이 아니었더라면 컬럼버스 마라톤은 샌디에고 마라톤 실패에 이어서 또 한 번 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의 짧은 마라톤 역사는 그것으로 끝이 났었을 것이다. 동창들이여, 고맙다.



 


35km 지점에서 걸어가고 있는 딸을 만났다. 딸은 마라톤 훈련을 나만큼 충분히 하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몸에 혈당이 고갈되었는지 (맞는 표현인가?) 뛸 힘이 전혀 없다면서 나에게 혹시 캔디 같은 단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첫 마라톤이라 나도 그런 준비를 못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캔디를 얻어보려고 했다가 그만두었다. 딸과 함께 걷다가 종착점을 2km 정도 남겨놓은 지점에서 함께 뛰기 시작해서 대망의 골인을 했다. 완주 시간은 4시간 40분 정도였는데 딸과 함께 5km를 걷지 않았더라면 4시간 30분 정도에 완주했을 것 같아서 좀 아쉽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딸의 완주를 도와준 것 같아서 흐믓하기도 했다.   



 


그렇게 첫 번 마라톤을 완주했다. 내가 마라톤 완주를 하다니. 황홀한 기분이었다. 이제 플로리다에 가서 동창들을 다시 만나면 완주했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 후회가 되는 것 한 가지는 그때 컬럼버스에 살고 있던 김승자-조성구 동문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김승자-조성구 동문과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어서 미리 연락을 하고 만날까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 마라톤을 끝낸 다음에는 내 몰골이 너무 엉망이어서 연락 안 하기를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연락을 해서 만나봤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다.



 




첫 번째 마라톤 골인을 딸과 함께 하고 있다.

 

<걔속합니다>


 


Copyright (c) 2004- By 박일선. All Rights Reserved. 이 글과 사진은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글과 사진을 수정하지 않고 저작자를 박일선으로 (혹은 Elson Park) 표시하는 조건으로 아무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5109 인사회 극장구경 간 날 (9월 21일) [23] 연흥숙 2011.09.22 231
5108 아침 햇살 [8] 박일선 2011.09.21 156
5107 For All [2] 오세윤 2011.09.21 212
5106 ● 길따라 걸음닿는대로 110921 : 햇살이 비치면 ● [18] 박성순 2011.09.21 173
5105 지난 주말에는 [20] 김동연 2011.09.20 162
5104 김흥권(金興權)을 다시 반갑게 만났습니다 [9] 이문구 2011.09.20 179
5103 튀니지 여행기 (4) 해수욕장 도시 Sousse [5] 박일선 2011.09.20 135
5102 어제, browsing note - 20 / 외 출 길 [18] 김영종 2011.09.19 198
5101 운현궁 [6] 정지우 2011.09.19 146
5100 [re] 운현궁 추가 한국 디지털협회 정기전 (9회 최성렬 선배 출품작) [2] 정지우 2011.09.19 114
5099 ▶ 바람과 함께 날아 온 친구 [18] 임효제 2011.09.18 231
5098 등산(767) [1] 김세환 2011.09.18 117
5097 등산(766) 김세환 2011.09.17 131
5096 생일 파티....맨하탄을 건너다 보면서 .......... [15] 이초영 2011.09.17 239
» 나의 마라톤 얘기 (1) [24] 박일선 2011.09.16 254
5094 연꽃의 신비로움과 고마움 [19] 연흥숙 2011.09.16 190
5093 전기란 !! [3] 전준영 2011.09.16 132
5092 등산(765) 김세환 2011.09.16 86
5091 제306회 금요 음악회 /비발디 [10] 김영종 2011.09.16 158
5090 The Emotion Of Love [4] 김재자 2011.09.16 167
5089 ★ 함께 보기로한 '나넬 모차르트' 소개합니다. ★ [7] 이정란 2011.09.15 170
5088 등산(764) 김세환 2011.09.15 90
5087 ▶ 인사회 모임 안내 110921 ◀ [7] 인사회 2011.09.14 149
5086 ♡남한산성 [10] 홍승표 2011.09.14 188
5085 [re] ♡남한산성 [6] 이초영 2011.09.15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