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열심히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 자기 오라버니 이름이 들어있나 싶어서다. 아내는 자기 오라버니가 이북에 살아있겠지 하는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내가 열심히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 자기 오라버니 이름이 들어있나 싶어서다. 아내는 자기 오라버니가 이북에 살아있겠지 하는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6. 25 사변이 나던 그 해 아내의 오라버니는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쇠꼴을 해 가지고 동네 들어서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을 인민군이 붙들고 장총을 메워보더니 총대가 땅에 끌리지 않자 됐다며 끌고 갔다고 한다.
그 해 늦가을, 전세는 이미 국군이 평양까지 밀고 올라갔느니, 압록강까지 갔느니 하는데 산골짜기의 가을은 늘 그렇듯이 청명하고 싸느랗게 그 해 여름의 비극 따위는 도외시한 채 깊어가고 있었다.
해거름에 나는 할머니와 뒷골 밭에서 무를 뽑고 있었다. 하늘이 살얼음처럼 새파랬다. 단풍이 불타는 산골짜기가 가을 깊이 잠겨서 죽은 듯 고요했다. 무밭에 산그늘이 지자 싸느란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할머니는 부지런히 무를 뽑고 나는 무더기를 지어서 짚단으로 덮었다. 된서리에 대한 대비였다.
한참 무를 뽑는데 그늘진 산에서 조심스럽게 가랑잎 밟는 소리가 나더니 산짐승처럼 인민군 패잔병이 나타났다. 인민군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더니 할머니와 내가 무를 뽑는 밭으로 왔다. 장총이 땅에 끌릴 듯 했다. 인민군은 키만 덜렁했지 기껏해야 나보다 두서너 살 위로보이는 소년이었다. 인민군의 누런 무명 하복(夏服)은 찢어지고 때에 절어있었다. 헝겊 군화도 해져서 발에 안 걸리는 듯 새끼로 동여맸다.
인민군은 아무 말 없이 조선무를 옷에 썩썩 닦아서 허기진 듯 어적어적 씹어 먹었다. 얼굴은 패각(貝殼)이 기어 다닌 갯벌처럼 더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중에는 분명히 눈물자국도 섞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는 것이다.
할머니가 어쩔 줄을 몰라 하시며 하던 일을 멈추고 밭둑으로 나가 앉아서 “이리 와서 앉아 먹어요.” 하고 인민군을 불렀다. 인민군은 할머니를 따라 밭둑으로 나와서 할머니 곁에 나란히 앉았다.
무 한 개를 다 먹은 인민군은 밭둑에서 일어섰다. 할머니가 얼른 머리에 쓰고 계시던 무명수건을 벗어서 “해줄 게 아무것도 없네-” 하시며 인민군의 볼을 싸매 주셨다. 밖에서는 사시장철 쓰고 사시는 할머니의 살갗 같은 당목수건이었다. 소년병은 땀에 절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할머니의 당목수건을 해주는 대로 가만히 받아들였다. 이미 뼛골까지 파고드는 산속의 추위를 겪은 때문일까, 당목수건에 밴 냄새가 고향의 부모님 냄새처럼 그리워서일까.
인민군 소년병은 다랑논 건너 맞은편 산등성이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도 쳐다보고 나도 쳐다보았다. 잎이 거의 진 나무들이 서 있는 산등성이가 까마득하게 높아 보였다. 인민군 소년병이 그 산등성이를 향해서 올라갔다. 인민군이 올라간 산발치에 옻나무가 새빨간 이파리를 달고 서 있었는데 그 눈부신 빛깔이 공연히 슬퍼서 맘속으로 ‘형-!’ 하고 부르는데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으셨다. 할머니도 내 맘 같으셨던 모양이다.
지금도 늦가을 외진 산골짜기에 서 있는 빨갛게 단풍 든 나무를 보면 장총을 땅에 끌면서 저문 산으로 올라가던, 위장망 끈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남루한 여름 군복을 입은 소년병의 작은 등허리가 보인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당목수건으로 볼을 싸맨 얼굴로 우리를 뒤돌아보던 산짐승 같이 슬픈 눈매가 보인다. 새빨간 옻나무 단풍 이파리가 보인다.
그 인민군 소년병이 과연 식구들에게 돌아갔는지, 어디서 얼어 죽었는지,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는지 그 해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깊어질수록 내 걱정도 같이 깊어졌다.
그 날 밤 어머니는 김장할 무채를 썰고 할머니는 물레를 돌리셨다. 밤이 꽤 깊었는데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코끝이 매운걸 보니 된내기(된서리)가 내리나 보다. 그 어린 게 어디서 된내기를 피할꼬-”
나는 그 해 여름 새재를 넘어서, 낙동강을 건너서 대구 아래 경산까지 아버지를 따라 피난을 다녀왔다. 별을 보면서 한뎃잠을 많이 잤다. 내 나이 열세 살이었다. 길게 날아가던 별똥별을 세다가 밤이슬을 맞으며 잤다. 여름이지만 밤이슬에 몸이 젖으면 추웠다. 된서리를 맞으면 얼마나 더 추울까. 그 날 밤 나는 단 구들 위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누워서 인민군 소년병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가 늦잠을 깨우며 “우리 도령이 무서운 꿈을 꾸셨나, 어쩐 눈물자국인고-” 하셨다. 그날 밤 나는 소년병이 얼어 죽는 꿈을 꾸었다.
가끔 늦가을 논둑 밑에서 얼어 죽은 메뚜기를 본다. 그때마다 소년병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되곤 했다. 아침에 보면 빳빳이 죽었는데 햇살이 퍼지면 메뚜기는 꼼지락거리며 살아났다. 그렇게 메뚜기는 겨울이 깊어지는 만큼씩 서서히 죽어간다. 나는 그게 신기해서 메뚜기의 죽음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 밤에 따뜻한 이불 속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얼어 죽어 가는 소년병이 생각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나의 소년시절은 그 인민군 소년병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나는 할머니가 당목수건으로 볼때기를 싸매 준 그 인민군 소년병이 아내의 오라버니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아내한테는 그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2011.12.0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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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끄 때일을 생생하게 그려주는구나.
모두 마음들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