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옥 같은 피천득 수필 감상 - "순례"
2012.02.02 11:32
순례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 경험의 표현이다. 고도로 압축되어 있어 그 내용의 농도가 진하다.
짧은 시간에 우리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눈을 통하여 인생의 다양한 면을 맛볼 수 있다.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으면서 침통한 비극을 체험할 수도 있다. 문학은 작가의 인격을 반향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을 통하여 위대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의 친구다. 같은 높은 생각을 가져볼 수도 있고 순진한 정서를 같이할 수도 있다. 외우 치옹의 말같이 상실했던 자기의 본성을 되찾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그 동안이라도 저속한 현실에서 해탈되어 승화된 감정을 갖게 된다.
사상이나 표현 기교에는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으나 문학의 본질은 언제나 정이다. 그 속에는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자연적인 슬픔, 상실, 고통’을 달래주는 연민의 정이 흐르고 있다.
가문의 자랑도 권세의 호강도 미와 부가 가져다 준 모든 것들이 다 같이 피치 못할 시각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길은 무덤으로만 뻗어 있다.
대양의 어둡고 깊은 동굴은 순결하고 맑은 보석을 지니고 많은 꽃들이 숨어서 피었다가는 그 향기를 황야 바람에 말려버린다.
토머스 그레이의 이 <촌락묘지에서 쓴 만가>는 얼마나 소박한 농부들의 심금을 울리고 얼마나 많은 위안을 주어왔을까. 영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이 시는 또 얼마나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해왔을까. 어떤 학자의 말같이 같은 언어로 엘레지를 배우면서 자란 영국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1차대전에서도, 2차대전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동의 적과 싸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어떠한 운명이 오든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느니 사랑을 하고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다.
테니슨이 그이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 시구는 긴 세월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물을 씻어주었을까.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이 2행의 시구는 (한시) 누구의 것인지 모르지만 많은 선비에게 긍지와 위안을 주어왔을 것이다.
문학에 정의 극치는 아무래도 연정이라 하겠다.
다른 이들 나의 님 되어 오다. 너 굳은 맹세를 저바림이라 허나 내 죽음을 들여다볼 때 잠의 높은 고개를 올라갈 때 술에 취했을 때 갑자기 너의 얼굴 마주친다.
W.B. 에이츠는 모드 곤에게 배반을 당했다. ‘유럽의 미인’이란 예찬을 받는 재기발랄하고 용감한 여자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예이츠에게 사랑을 주어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매시지를 보내왔다. 다른 사람이란 애란 독립운동 투사인 한 젊은 장교였다. 예이츠가 그 편지의 겉봉을 찢을 때 그의 생애는 두 토막 났다고 한다.
황진이, 그는 모든 곤보다도 더 멋진 여성이요 탁월한 시인이었다. 나의 구원의 여상이기도 한다. 그는 결코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동짓달 기나긴 반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밤이여드란 구비구비 펴리라.
진이는 여기서 시간을 공간화하고 다시 그 공간을 시간으로 환원시킨다. 구상과 추상이, 유한과 무한이 일원화되어 있다. 그 정서의 애틋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수법이야말로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154수 중에는 이에 따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 어느 문학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하게 하여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준다. 도연명을 읽은 뒤에 국화를 더 좋아하게 되고 워즈워스의 시를 왼 뒤에 수선화를 더 아끼게 되었다. 운곡의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알기에 대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백화 나무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은 시인 프로스트를 안 후부터다.
바이런의 소네트가 아니라면 쉬옹의 감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요, 수십 년 전에 내가 크레인의 시 <다리>를 읽지 않았던들 작년에 본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가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보였을까.
어려서부터 나는 개는 그렇게 좋아해도 고양이는 싫어하였다. 그러던 내가
얼마 전 <신한국문학전집>에서 지용의 향수를 반갑게 다시 보고 오래 잊었던 향수가 새로워졌다. 제가 식어진 질화로와 엷은 졸음에 겨운 늙은 아버지가 돋아 괴시는 짚베개가 그리워졌다. 사실 나는 질화로가 하나 갖고 싶어서 지금 구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는 밀레의 그림에서 보는 여인상이다.
<향수>에 이어 생각나는 노천명의 <고향>.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어라.
장연이 고향인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영혼이 있어 고향에 돌아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리라.
<무도회의 수첩>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직 미모를 잃지 않은 중년부인이 그가 처녀시절에 가졌던 수첩 속에서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발견한다. 그가 춤을 약속했던 파트너들, 여인은 그 이름들을 찾아 한가한 여행을 떠난다. 지금 나는 그런 순례를 한 것이다. (끝)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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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선
2012.02.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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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2012.02.02 11:32
가슴이 아직도 울렁거리는 글을 읽었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반가운 글을 만났네요. 감사합니다.
따뜻한 나라에서 땀흘리다니
추위에 떨고있는 우리들을 비웃는 듯 하군요, 박일선님! -
연흥숙
2012.02.02 11:32
아주 추운 날 수필 한편을 읽게 해주셨네요.
피천득 교수님의 수필은 쉬운듯 하면서 그 여운의
진한 국물이 가슴에 뚝뚝 떨어지는 양식을 주고 있습니다.
무지한 나를 한탄합니다. 제시한 책의 내용은 어디선가
낯익은 데 그 책을 본 기억은 없어서요. 우선 지용의 향수를
찾아 볼까 합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이기정
2012.02.02 11:32
1980년대 어느날 오후, 당시에 막 해금된 노래
정지용의 <향수>를 혼자 처음으로 들었을 때에 느꼈던
그 전율같은 감동이 다시 밀려옵니다. -
연흥숙
2012.02.02 11:32
와, 기정아 이제 알겠다.
<향수>가 바로, 박인수 교수, 조영남씨가 잘 부르는
넒은 벌 동쪽 끝으로...실개천이 흐르는... 그 노래를 말하는구나.
넌 문학소녀이면서 시대적 감동이 예민하게 자랐구나. -
이민자
2012.02.02 11:32
주옥같은 피천득 교수님의 수필 잘 읽었읍니다.
춥고 울적 한데 어디선가 찬미가 들려 오는듯 ....
언제 읽어도 감동적인 수필 감사 합니다.
여행을 하시면서도 정서적인 감성이 풍부하시어
이곳에 까지 글을 보내 주시는군요,
남은 일정 더위에 건강 조심 하시고 다음또 기다 리겠읍니다. -
연흥숙
2012.02.02 11:32
박일선씨 지금도 반바지 입고 구경 잘 하고 계시겠지요?
더웁지요? 시원한 소식하나 전하겠습니다.
어제 일요일 아침에 KBS1(10시)에서 명품스캔들을 진행하는데
조용남등이 나와서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답니다. 먼저 시를 읊
프고, 노래를 한 후 왜 금지되었다가 해지 되었는가의 뒷이야기도
하더군요. 이유는 월북한것이라고 보았던 사실을 납북으로 해명한
이후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니 박일선씨가 한국방송의 명품을 리드하는 선구자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관심갖게 되구요.
언젠가는 이정면씨의 아리랑에 대한 이야기도 하더군요.
이정면씨도 박일선씨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항공편으로 방콕을 떠나서 미얀마 수도 양곤으로 떠납니다.
방콕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에서 미얀마 비자를 냈는데
비자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땡볕에서 줄에 서서 기다리느라고 땀 좀 흘렸습니다.
지금 미얀마는 관광 붐인 것 같습니다.
방 잡기도 쉽지 않고 비용도 많이 올랐답니다.
23일 방콕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태국 여행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