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옥 같은 피천득 수필 감상 - "봄"
2012.03.05 19:12
봄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
이러한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렇게 읊은 시인도 있다. 이들은 사치스런 사람들이다. 나같이 범속한 사람은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는 것만 해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를 띄우고 하늘을 바라다보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그림이나 조각을 들여다볼 때 잃어버린 젊음을 안개 속에 잠깐 만나는 일이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나의 기쁨의 하나는 글을 통하여 먼발치라도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젊음을 다시 가져보게 하는 것은 봄이다.
잃었던 젊음을 잠깐이라도 만나본다는 것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헤어진 애인이 여자라면 뚱뚱해졌거나 말라 바스러졌거나 둘 중이요, 남자라면 낡은 털 재킷같이 축 늘어졌을 것이다. 젊음은 언제나 한결갈이 아름답다. 지나간 날의 애인에게서는 환멸을 느껴도, 누구나 잃어버린 젊음에게서는 안타까운 미련을 갖는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와 번뇌를 해탈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음만은 못하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구십삼 퍼센트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그러니 사십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사십년이라면 인생은 짧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면, 그리 짧은 편도 아니다.
“나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하고 부르는 아이들의 나비는 작년에 왔던 나비는 아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지만 그 제비는 몇 봄이나 다시 올 수 있을까?
키츠가 들은 나이팅게일은 사천 년 전 루스가 이역 강냉이 밭 속에서 눈물 흘리며 듣던 새는 아니다. 그가 젊었기 대문에 불사조라는 화려한 말을 써본 것이다. 나비나 나이팅게일의 생명보다는 인생은 몇 갑절이 길다.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과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과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사십 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작은 축복이 아니다. 더구나 봄이, 사십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것이다.
녹슨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 사는 사람에게도 찬란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궁에 유폐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아아, 봄이 오고 있다. 순간마다 가까워오는 봄!
|
댓글 11
-
박일선
2012.03.05 19:12
-
김동연
2012.03.05 19:12
봄이 싫은 사람도 있을가요?
참, 위의 시인들은 싫어했네요.
나도 봄이 오는 것이 확실하니까
겨울을 견딘답니다.ㅎ.ㅎ. -
박일선
2012.03.05 19:12
그런데 한국 같이 아름다운 봄이 없는
동남아는 불행한 곳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우기와 건기 뿐이지요, -
연흥숙
2012.03.05 19:12
봄에 바이올렛이 핀다고 하시는 표현이
이상하게 멋쟁이 교수님? 하고 불러지네요.
노랑 개나리, 분홍 진달래, 어려서 입던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를 떠올리게 합니다.
라일락 향기가 퍼지는 봄이 오고있군요. -
박일선
2012.03.05 19:12
피천득 선생님은
분명히 멋진 분이였습니다.
저는 만나뵙는 영광을 뭇 누렸지만
우리 동창들 중에는 피천득 선생님을
스승으로 가깝게 모셨던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러워라. -
김승자
2012.03.05 19:12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라고 쓰셨는데
너무 가혹하셨습니다.
우리 딸이 사십을 넘었는데...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그만큼 성숙하여
인생을 관조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고 싶네요.
지금은 인생은 칠십부터라고 악다귀를 쓰는 판인데... -
박일선
2012.03.05 19:12
아마 젊으실 때 쓰신 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피천득 님의 또 다른 수필 "송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을 고쳐서 ‘인생은 사십까지’라고 하여 어떤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은 사십부터도 아니요, 사십까지도 아니다. 어느 나이고 다 살 만하다." -
임효제
2012.03.05 19:12
잠시 여가를 즐기시는 군요.
주옥같은 수필,,, 좋지요 박형 !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니,,
"늙으면 풀라톤도 숨만 쉬는, 송장이 된다"는 말은 어떤지요. ㅎㅎㅎ
박형은 건강한 신체를 갖았으니,
녹슨 심장이지만 붉은 피가 콸~콸~ 용소슴치니, 오래 오래 봄을 반기시소 ! 하하하하... -
박일선
2012.03.05 19:12
신체보다 마음이 건강한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다?
매조는 오래 오래 건강한 마음을 간직해서
오래 오래 사시소. -
김영길
2012.03.05 19:12
봄을 읽으니 봄을 새롭게 맞이하게 되는군요.
우리들의 아름다운 aging이란 봄의 향연에
기쁘게 참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피천득교수님의
바램이 아니엇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문제요,우리의 생각의 문제가 아닐까요? -
박일선
2012.03.05 19:12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올 봄은 더 반갑게 마져봅시다.
번호 | 제목 | 이름 | 날짜 | 조회 수 |
---|---|---|---|---|
5906 | 동영상 촬영에 광하여 [4] | 황영자 | 2012.03.07 | 139 |
5905 | 연습 [4] | 이은영 | 2012.03.07 | 131 |
5904 | 동영상 연습 [2] | 김영종 | 2012.03.07 | 118 |
5903 | 황감독 동영상공부 [4] | 권오경 | 2012.03.07 | 125 |
5902 | 등산(906) [1] | 김세환 | 2012.03.07 | 84 |
5901 | 테스트~ ( 부고 11회 동문 우주여행기 ) [1] | 이태영 | 2012.03.07 | 140 |
5900 |
' 3月 첫 번째 " 인 사 회 " 날에 ㅡ <'여름용' 日記 (2842) >
[2] ![]() | 하기용 | 2012.03.07 | 147 |
5899 | ★걷지 못하면 끝장★ [10] | 홍승표 | 2012.03.06 | 224 |
5898 |
' 추계초등학교 ㅡ <'여름용' 日記 (2841) >
[1] ![]() | 하기용 | 2012.03.06 | 216 |
5897 | 등산(905) [2] | 김세환 | 2012.03.06 | 108 |
5896 |
' 봄비가 나린다 ㅡ <'여름용' 日記 (2840) >
[5] ![]() | 하기용 | 2012.03.06 | 133 |
5895 | 액체 얼음 (Liquid Ice) [14] | 신승애 | 2012.03.05 | 172 |
5894 | 등산(904) | 김세환 | 2012.03.05 | 93 |
» | 주옥 같은 피천득 수필 감상 - "봄" [11] | 박일선 | 2012.03.05 | 250 |
5892 |
' 오늘은 경칩(驚蟄) ㅡ <'여름용' 日記 (2839) >
[1] ![]() | 하기용 | 2012.03.05 | 127 |
5891 | LALA-통섭을 통한 2월 홈페이지 小考( 체계를 세우지 아니한 고찰 ) [4] | 최종봉 | 2012.03.04 | 209 |
5890 | ◈ 경안천, 세미원 모아모아 (최경희 추가)◈ [18] | 이정란 | 2012.03.04 | 206 |
5889 |
' 시계줄을 갈아주는 아저씨 ㅡ <'여름용' 日記 (2838) >
[6] ![]() | 하기용 | 2012.03.04 | 142 |
5888 | 산우회 시산제 [6] | 박창옥 | 2012.03.04 | 208 |
5887 | 봄이 왔어요. [1] | 황영자 | 2012.03.04 | 215 |
5886 |
' 두개의 헤피앤딩 스토리 ㅡ <'여름용' 日記 (2837) >
[2] ![]() | 하기용 | 2012.03.04 | 149 |
5885 | 박영국 동문 아들 결혼식에 다녀와서 [2] | 이문구 | 2012.03.03 | 205 |
5884 | 등산(903) [1] | 김세환 | 2012.03.03 | 109 |
5883 | 방안 정원에서 [10] | 김동연 | 2012.03.03 | 224 |
5882 | [re] 방안 정원에서 [14] | 김동연 | 2012.03.04 | 128 |
어느 시인이 그렇게 읊었다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번 여행 중에 알게 되었다.
T. S. Elliot이란 영국 시인이 버마의 4월을
"the cruellest month"라고 했다는데
그 이유는 버마에서는 4월이 제일 더운 달인데
아마 너무나 더워서 그런 표현을 쓴 모양이다.
버마 4월의 더운 기후가 이번 여행 중에 읽은 책
"The Burnese Days"에 묘사되었는데 (냉방이 없던 1920년대 버마 배경)
정말 지겹도록 더운 모양이다.
T. S. Elliot이 버마의 4월 기후를 아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한국의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