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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싸는 게

2012.04.19 09:20

오세윤 조회 수:189

 

대장 내시경




                                             




 “그렇게 고기를 좋아하더니, 결국·····.”


 대장내시경으로 떼어낸 다섯 개의 용정 중 직경 1.5cm인 하나가 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혼자 속으로 자조 섞어 씹어댄 말. 원래 짜고 맵게 먹어온 식성에 고기는 또 얼마나 즐겨했던가. 특히 삼겹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식탐이었으니 이 나이에 몸이 온전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라고 스스로를 나무라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소 읽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개월 여, 지난 연말부터였다. 이틀이 멀어라 회식이 잦던 연말 끝 무렵, 중식당에서 있은 동창 송년모임을 끝내고 온 날 밤부터 뱃속이 까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방귀가 잦아지고 아랫배가 무지근 불쾌하면서 반설사가 연달아 이어졌다. 다음날 일찍 후배의 병원을 찾아 정장제를 처방받았지만 사흘을 복용해도 별반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간간이 점액변이 나오면서 겨우 참아낼 정도로 배가 기분 나쁘게 아팠다. 아무래도 비위생적인 음식물로 인한 세균성 장 질환에 이환된 듯 했다. 항생제를 5일간 복용하고야 변이 정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완치된 건 아니었던 듯, 괜찮으리라 싶어 술을 한 잔 하거나 육식을 하고나면 여지없이 재발했다. 그럴 때마다 약에 의존하거나 한 두 끼 굶는 것으로 속을 다스리고는 했지만 기대대로 쾌하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궤양성 대장염이거나 과민성 대장 증후군인가 싶어 그에 해당하는 약들을 복용해 봐도 별무효과였다.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장승배기에서 내과를 개원하고 있는 이용국 동문에게 전화를 넣어 증상을 말했더니 대장에 암이 생기면 평시의 장 습성(Bowel habit)이 변해 그런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며 대장 내시경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다. 더구나 나이 70이 넘으면 대장내시경검사는 해마다 해보는 게 원칙인데 검사한지 5년이나 지났다니 말이 되느냐고 내 태만을 나무랐다. 그 길로 후배가 운영하는 인근의 준 종합병원에 예약을 하고 다 다음 날 검사를 받았다.

 검사 일주일 뒤 결과를 보러 간 병원에서 조직검사상의 암 판정을 받고 이어 복부 CT촬영을 했다. 혹 다른 장기에 전이된 병소가 있을 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깨끗했다. 보험공단에 암 등록을 하고 수술을 받기위해 대학병원에 진료예약을 마쳤다.

 그간 건강에 자신했던 오만을, 스스로의 몸도 돌보지 못한 태만을 자책하며 병원을 나섰다. 감기만 들어도 “의사도 아프냐?” 며 놀리던 친구들이 내가 암에 걸렸다면 속으로 얼마나 웃을까.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면서 언제부터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까를 곰곰 헤아려봤다. 이미 3년은 된 듯싶었다.

 

 

 3년 전 여름, 막걸리에 해물파전을 먹고 난 뒤 급작스럽게 하복부산통을 동반한 설사를 시작했다. 식중독으로 자가진단을 하고 정장제를 복용하며 죽으로 속을 다스렸다. 나흘이 지나서야 증상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며칠이 못 가 다시 재발했다. 의아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오진을 한 건가 아니면 약을 잘못 쓴 건가. 비에비스 나무병원으로 민영일동문을 찾아가 그의 처방으로 약을 복용하고서야 쾌차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비슷한 증상이 두서너 달에 한 번 꼴로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같은 처방으로 약을 지어 복용해 증세를 다스렸을 뿐 설마 암일까 하는 생각은 만에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러기 불과 2년 전에 위·장 내시경을 하면서 1cm미만의 작은 용종을 몇 개 떼어냈던 때문이었다.

 용종을 그냥 두었을 때 10년 후 대장암이 될 확률이 8%이며 20년 후에는 24% 라는, 용종의 직경이 1cm미만이면 암 발생 확률이 1% 이하라는, 2cm 이상이라야 35%에서 암으로 발전한다는 통계상의 의학지식을 나는 너무 과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60세 이상 한국인의 30%가 용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대수로울 게 없다고 생각하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오만과 설마가 병을 키운 원흉이었다.

 

 

  암이라고 진단을 받았지만 마음은 의외로 담담했다. 위가 아닌 대장이라 다행이다 싶은데다 크기가 작고 전이가 없어서 더 그랬다. 진료실을 닫고 지낸 지난 10년을 돌이켜봤다.

 글을 쓰는 기쁨을 얻은 덕에 다른 자지레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산 축복받은 10년. 아프지 않고 평화롭게 맞은 아침들. 화사하게 봄을 맞고 건강하게 가을에 들어 산에 오른 10년을 돌아본다. 꺼림칙한 일은 아예 만들지 않으려 애쓰며 산 날들. 바른 마음이 이르는 대로 살고자 한 늙마의 날들. 늦게나마 그런 날들이 주어진 게 얼마나 고마웠던가.

 글을 쓰면서 알게 된 한 벗이 하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잘 먹고 잘 싸는 게 행복이야.”

 그때는 그게 얼마나 고맙고 복된 일인 줄을 모르다가 이제야 비로소 절감한다. 나이 들었으니 당연하다는 듯 찾아든 병, 포용은 못해도 밉다는 생각을 덜어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느슨하게 보내는 노경을 한번쯤 점검해보라는 뜻의 쉼표는 혹 아닌가싶은 생각도 든다. 다음 예약진료일에 대학병원엘 가면 담당교수가 어떤 조치를 취할지 걱정하는 아내, 수술하지 않고 치료하는 방법은 혹 없느냐 묻는 그네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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