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옥 같은 피천득 수필 감상 - "반사적 영광"
2012.05.12 16:10
반사적 영광
도산 선생을 처음 만나보았을 때의 일이다. 선생이 잠깐 방에서 나가신 틈을 타서 선생의 모자를 써보고 나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선생이 짚으시던 단장과 거의 비슷한 것을 살 수 있었다. 어떤 친구를 보고 선생이 주신 것이라고 뽐냈더니 그는 애원애원하던 끝에 한턱을 단단히 쓰고 그 단장을 가져갔다. 생각하면 지금도 꺼림칙할 때가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 친구로 하여금 그가 그 단장을 잃어버릴 때까지 수년간 무한한 기쁨을 누리게 하였으니, 나는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이다.
몇 해 전 영국 대사의 초대에서 돌아오니 서영이가 달려나오면서 내 손을 붙들고 흔든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서영이 말이, 대사 부인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악수를 하였을 너이니 그의 손과 악수를 한 아빠 손을 잡고 흔들면 여왕과 악수를 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전 우리나라 예법으로는 임금이 잡으신 손은 아무도 다치지 못하도록 비단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그 존귀한 손의 소유자는 일생을 손이 하나 없는 불구자같이 살면서도 늘 행복을 느꼈으리라. 잘못 역적으로 물려 잡혀갈 때라도 형조관헌들도 그 손만은 건드리지 못하였을 터이니, 그는 붙들려 가면서도 자못
옛날 왕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어떤 영국 사람은 자기 선조가 영국 왕 헨리 6세의 지팡이에 맞아 머리가 깨진 것을 자랑삼아 써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바이런이 영욱 사교계의 우상이었던 때, 사람들은 바이런같이 옷을 입고 바이런같이 머리를 깎고 바이런 같은 웃음을 웃고 걸을걸이도 바이런같이 걸었다. 그런데 바이런은 약간 절름발이였다.
내가 더 젊었을 때 잉그리드 버그만이 필립 모리스를 핀다는 기사를 일고 담배 피지 않는 내가 모리스 한 갑을 피워본 일이 있다. 이십 센트로 같은 순간에 같은 기쁨을 가졌던 것이다. 담배와 술 그리고 화장품 까지에도 관록이 붙는다. 웰링턴이 다닌 이튼 학교, 글래드스턴이 앉아서 공부하던 책상, 이런 것들의 서광은 찬란하고 또한 당연한 것이다. 미국 보스턴 가까이에 있는 케임브리지라는 도시에 롱펠로의 <촌 대장장이>라는 시로 유명해진 큰 밤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이 나무가 도시계획에 걸려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신문 사설에까지 대립된 논쟁이 벌어졌으나 마침내 그 밤나무는 희생이 되고 말았다. 소학교 학생들이 1센트씩 돈을 모아 그 밤나무로 안락의자를 하나 만들어 롱펠로에게 선사하였다. 시인은 가고 의자만이 지금도 그가 살고 있던 집에 놓여 있다. 나는 잠깐 그 의자에 앉아보았다. 그리고 누가 보지나 않았나 하고 둘러보았다.
얼마 전 일이다. 어떤 친구가 길에서 나를 붙들고 “박 사장하고 사돈이 되게 됐네” 하고 자랑을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다. 해방 전에 박 사장과 저녁 한 끼 같이 먹은 것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박 사장은 라디오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사장은 아니다). 하물며 수양대군파라던지 또는 송우암의 몇 대 손이라든지 이런 것을 따지는 명문 거족의 족보는 이 얼마나 귀중한 문서랴! 양반이 아니라서 그런지 우리 집에는 족보가 없다.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하나다.
하버드 대학에는 로링스라는 키츠 학자로 유명한 교수가 있었다. 스물 여섯에 죽은 시인을 연구하느라고 칠십 평생 다 보내고 아직도 숨을 헐떡이면서 <엔디미온>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천재에 부닥치는 환희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로링스 교수뿐이랴. 그 수많은 셰익스피어 학자들, 비평가들은 자기들이 저 위대한 시인과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는 줄 알고 있는 것이다. 보즈웰이 <존슨 전기>로 영문학사에 영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예라고 하겠다.
끝으로 나는 1954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프로스트와 같이 보내고 헤어질 때 그가 나를 껴안았다는 말을 아니할 수 없다. 나는 범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비치듯, 이탈리아의 플로렌스가 아테네의 문화를 받아 빛났듯이, 남의 광영을 힘입어 영광을 맛보는 것을 반사적 광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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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0일 후에는 친구님들과 나의 사랑하는 대한민국 산천을 다시 대하게 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입니다.
긴 여행을 끝내고 귀국을 할 때 항상 느끼는 마음입니다.
필리핀에 살고 있는 이화자-김준경 동문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만나보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입니다.
그럼 귀국해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