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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22회 이승하

2012.11.30 08:13

김승자 조회 수:185











파문



이승하 22회



공원의 숲이 있는 풍경은 11월엔 모른 척하기 힘든 유혹이다.

빛 바래고 헐벗기 시작한 수목들, 가장 가을다운 구도로 산책로에 깔린

낙엽, 키 큰 떡갈나무 꼭대기에 찔릴 듯이 낮게 내려앉은 회색 하늘…….

그래서 아침운동의 장소를 11월 한 달만 학교운동장에서 공원으로

옮기기로 했던 것이다.

원래 공원에서 아침운동을 한지는 10수 년이 넘었다. 자연히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공원에

공사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거의 연중 공사 중이어서,

결국 그 꼴이 보기 싫어 공원을 떠났던 것이다. 그래도

11월이면 가끔 공원 숲길을 찾아오긴 했지만…….

그 몇 년 사이 얼핏 풍경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공원에 나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아는 얼굴 하나 부딪치는 일이 없었다.

전에 공원에서 알게 되었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취를 감춘 것

같았다. 아마 이사를 갔거나, 나처럼 운동장소를 옮겼거나,

혹은 더러는 돌아가시기도 했을 것이다. 며칠째 아는 얼굴 하나 없이 걷거나

뛰던 어느 날, 드디어 아는 노인 한 분과 마주쳤다. 아주 오래 전 그 노인은

나를 붙잡고 무릎 통증을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무릎에 이상이

생겨 뛰지 못하고 걷기만 할 때가 있었는데, 다시 뛰게 된 것을

보고 어떻게 나았느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복용했던

약을 알려드렸다.

“오랜만이네. 난 이사간줄 알았지.”

노인은 내 인사에 손 흔들며 대답하고는 이내 지나쳤다.

보리수가 모여 자라는 곳이 세 군데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은 많이 손상된

것 같았다. 진달래 군락은 거의 사라졌다.

커피자판기가 새로 놓이고, 근래 비가 많아진 탓인지

잔디광장에 도랑을 터놓았다. 풍경들이 야금야금 훼손되고 호수의 분수를

제외하고는 인공조물들이 촌스러워졌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엇?”

“하하, 걷는 모습을 보고 지점장님인줄 알았어요!”

뒤쪽으로부터 불쑥 내 앞으로 나선 그녀를 알아보는데 1~2초이긴 하지만

시간이 좀 걸렸다. 갑자기 기온이 0도까지 떨어진 탓인지 검은 털모자를

두눈 위까지 꽉 눌러쓰고 두꺼운 파카와 바지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이건 달리는 모드가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데려다 주고 오는 모드예요.”

몇 년만이던가? 내가 공원을 버리고 집 근처 학교운동장으로 장소를

옮겼을 때, 어느 날 새벽 느닷없이 학교운동장 트랙에 나를 찾아

그녀가 나타났던 것이…….

“그때 아이가 고3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걘 지금 군대에 간걸요.”

서로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안부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녀를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가끔 나를 보았다고 했다. 내가

학교운동장 트랙을 돌고 있을 때 학교 담장 밖 길을 지나가면서…….

나는 그 사이 은행에서 퇴직했음을 고했고, 그녀는 전원주택이

팔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그래서 할 수 없이 며칠 전 텃밭에

양파를 심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예전에 공원에서 함께 달리기를

하던 사람들을 서로 하나 둘씩 끄집어냈는데, 번갈아 소식을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제 이곳 공원엔 우리 둘만 남은 것 같네요.”

문득 그녀의 치렁치렁 길고 아름다운 머리 모습이 떠올랐다. 전에 그녀는

새벽 공원에서 늘 극적으로 내게 나타나곤 했었다. 펄럭펄럭 머리카락을

날리며 나를 추월해서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며 한참 달려가다가

휙 돌아서 달려와 다시 나와 보조를 맞추곤 하지 않았던가? 당시

나의 달리기는 결코 그녀를 따라잡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뭐야? 그냥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치며 나타났잖아?

나는 검정 털모자를 푹 뒤집어쓴 그녀를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제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일까? 하지만 털모자 속에 감춰진 모습을

나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머리카락을 자르셨어요, 라고 물어보려다가

순간 혹 끔찍한 대답이라도 듣게 될까 더럭 겁이 나서 얼른 말을 돌렸다.

. “혹시, 요즘 대회에 나가본 적 있어요?”

"네. 얼마 전 춘천에서 10km코스를 뛰었어요.”

겨우 10km를? 그녀는 풀코스 완주경력도 있고 하프코스 정도는 자주

가볍게 달렸던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기록은요?”

“한 시간이요.”

“에계? 한 시간씩이나? 원래 엄청나게 빨리 뛰잖아요.”

“그러게요. 저도 이제 늙었나 봐요.”

그럭저럭 산책로가 갈라지는 곳까지 왔다.

“이젠 공원에서 자주 뵙겠네요?”

“11월은요. 눈이 내리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고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더

걸어갔을 때였다.

“지점장님~~~”

'님’의 바이브레이션이 유난히 길고 강해서 마치 짜증난 목소리처럼

들려왔다.

“네?”

그녀가 나를 향해 울상인 얼굴로 서있었다.

“저 열심히 뛴 거예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뛴 거라고요.”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울상인데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알고 있어요. 정말 잘 한 거예요.”

딱딱, 딱딱……. 그때 내가 왜 박수를 쳤는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박수를 쳤고, 그 순간 박수소리의 파장이

내 가슴을 때렸다.

박수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바람 때문인지 호수에도 파문이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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