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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로 태어나서 -1

2013.03.04 23:16

오세윤 조회 수:127

 

사나이로 태어나서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짠 짜잔 -,”


 술이 몇 순배 돌아 거나해지면 동규는 벌떡 일어나 의례 군가를 부른다. 그것도 딱 위의 한 소절만을 연거푸 부른다. 왼쪽으로 고개를 갸웃이 들어 돌린 채 꿈인 듯 생시인 듯 어리마리한 표정으로 발 박자를 맞춰가며 낮게 군가를 부른다.


 그럴 때면 그가 벌써 자기주량을 다 채운 것임을 알고 더는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거기서 한두 잔만 더하면 동규는 곧장 고개를 푹 꺾고 앉아 코를 골아대는 게 정해진 코스여서 그냥 버려두고 우리들끼리 술잔을 돌리며 된소리 안 된 소리로 회포들을 푼다.


 군가를 부를 때의 친구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다. 허공을 향해 고정된 눈에는 이미 우리들도 없고 현재도 없다. 다른 곳 다른 시간 속을 배회하고 있는 모양새로 말을 해도 듣는 둥 만 둥 이다. 친구들은 그 순간 동규가 젊은 날의 군대시절로 돌아가 있는 거라고도 하고, 홀어머니와 두 여동생과 함께 지내던 고향을 꿈꾸고 있을 거라고도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지금 동규가 그의 첫사랑 댕기머리 애심이를 그리고 있는 거라며 키득키득 웃기도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6·25 전란 통에 충청도 한 소읍으로 피란 내려가 그곳 야간고등공민학교(중학과정)에 입학하면서였다. 나는 그때 그와 별로 가깝지 못했다. 열다섯 늦은 나이에 입학한 나보다도 두 살이나 더 많았던 탓도 있었지만 앉아 공부하는 자리가 달라 거의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학교에서 거리가 꽤 되는 역에서 소사로 일하던 그는 거의 매일 지각하다시피 등교해 항상 뒷자리에 앉아 공부했고, 끝나면 곧장 교실을 빠져나가 말 나눌 틈이 없었다.


 하긴 우리들 거의 모두 정규학교의 급우들처럼 그렇게 가깝게 지낼 처지가 못 되었다. 대부분 낮엔 직장들을 다녀 개인적으로 사귈 겨를을 거의 갖지 못했다.


 야간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 자원입대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우리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던 동규를 다시 만난 건 오십대 중반, 서울 사는 동기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작은 모임에서였다. 그때 동규는 법무사사무실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사무장일 뿐 친구는 주로 멀리 지방을 다니며 서류를 전달하는 따위 외근 일을 했다.

 그때만 해도 동규는 매사 의욕이 넘치고 능동적이고 활기찼다. 하지만 만나 함께 지내기 서너 해 뒤부터 점차 언행에 이상한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놀림이 굼떠지고 목소리가 속삭이듯 가늘어졌다.

 

 

 학생 때부터도 말이 없고 목소리가 작았지만 점차 더 약해져 한껏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만 무슨 이야기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걸음걸이도 뚜렷하게 느려지고 등도 구부정하게 굽어갔다. 때로는 왼쪽다리에 감각이 없다며 꼬집어 보라기도 하고,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돈 계산을 못해 쩔쩔매기도 했다. 어떤 날은 오줌을 지려 기저귀를 갈아 차야 한다며 모임 중간에 일어나 집으로 가는 때도 있었다.

 자주 일상의 단어들을 잊어먹고 곧잘 재우쳐 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스스로 치매 초기나 아닌지 모르겠다며 애매하게 웃었다. 자기가 사는 동네 이름을 잊어버리고 “내가 사는 동이 무슨 동이지?” 하고 되레 우리들에게 묻는가 하면 아버지의 누나를 뭐라고 부르냐고 참 어처구니없는 없는 질문을 해대기도 했다. 왼쪽과 오른 쪽을 헷갈려 의아해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때마다 우리는 그가 우스개로 농을 하는 줄로 여겨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뇌경색의 진행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들이란 걸 알게 된 건 그 얼마 뒤 법무사사무실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소식을 이웃 친구가 공개하고 나서였다. 그 뒤부터 동규는 모임에 더는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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