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뒷산 중턱에 코스모스가 무더기로 폈다. 몇 해 전부터 한 둘 피기 시작하더니 지난해에는 남향받이 대부분을, 올해는 동쪽 면 산자락을 온통 다 차지해 피어 꽃 둔덕을 이루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꽃씨를 흩뿌려 퍼뜨린 듯하다. 평소 주민들이 즐겨 오르는 완만한 산길이 코스모스가 핀 뒤로는 온 식구가 동반하는 가족 등산로가 됐다.
아파트 뒷산 중턱에 코스모스가 무더기로 폈다. 몇 해 전부터 한 둘 피기 시작하더니 지난해에는 남향받이 대부분을, 올해는 동쪽 면 산자락을 온통 다 차지해 피어 꽃 둔덕을 이루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꽃씨를 흩뿌려 퍼뜨린 듯하다. 평소 주민들이 즐겨 오르는 완만한 산길이 코스모스가 핀 뒤로는 온 식구가 동반하는 가족 등산로가 됐다.
청명한 날 아침 느지막이 산엘 오르다보면 홀연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 잠시 어리둥절해지고는 한다. 코스모스 흐드러진 경사면 너머로 하늘이 파랗게 열리고, 그 위로 여린 흰 구름이 떠 흐르는 정경이 마치 어린 날의 꿈동산에 오른 듯 몽환적이 되기도 하고, 때로 김동리의 시 <귀거래 행>의 한 구절 속을 걷는 듯 무색계에 빠지기도 한다.
하얀 모랫내 건너/ 노란 들녘 지나/ 파란 솔등 돌고/ 코스모스 헤치며/...........
아아, 이렇게 고향에 다녀오듯/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올 순 없을까
이곳 산길에는 꽃이 많다. 봄이면 생강나무, 산수유를 시작으로 개나리, 벚꽃, 철쭉, 산나리가 피고, 여름이면 금계국, 쑥부쟁이에 이어 천인국, 붓꽃에 겅성드뭇 옥잠화도 핀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마음잡고 심었을 것이다.
집 베란다에 키우는 화분 꽃보다 나는 이렇게 야생으로 만나는 꽃을 더 좋아한다. 공간에 갇혀있는 걸 못 견뎌하는 들바람 같은 성깔 때문인 듯도 하고, 햇볕과 이슬을 모르고 피는 화분 꽃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인 듯도 하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정이 여성적이라고 벗들은 가끔 나를 농하여 웃는다. 무슨 남자가 그리 꽃을 좋아하냐고, 그런 남자는 여자도 좋아한다고 실없이 말하여 좌중의 웃음 감을 삼기도 한다.
한택식물원에 갔을 때다. 정신없이 꽃밭을 헤매는 나를 보던 한 동행이 우스개를 했다. 진득이 한 꽃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이 꽃도 좋다하고 저 꽃도 좋다하니 무슨 남정네가 눈길이 그렇게 헤프냐. 그러니 분명 정 또한 그렇듯 헤프다 하지 않느냐, 지조인들 있겠느냐며 농담 삼아 면박을 줬다. 변명할 일이 아니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로 겪은 일은 단순히 우스개로만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 홈 피에 두어 차례 어줍은 시를 올리면서 꽃을 두고 ‘그니’타령을 했더니, 엉뚱하게도 ‘그니’가 누구를 지칭 하는가 억측을 낳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남녀 공학이라는 특성으로 가끔 일어나는 해프닝이려니 여겨 달리 해명하지 않고 침묵하여 지나쳤다. 그런 일 저런 일로 하여 그로부터 나는 정말 지조 없고 정 헤픈 남정네로 아예 낙인찍히고 말았다.
아, 나는 얼마나 실없는 남정네가 된 것인가. 남들 눈에 그렇게도 정 헤프고 지조 없는 사나이로 보였던가. 타고난 성정 때문인가 아니면 혹 전생에 이 꽃 저 꽃을 농하여 날던 나비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지금껏 그를 지루하게 꼬투리 잡는 물색모르는 친구가 있어 그를 대할 때마다 내 진정 실없는 남자인가 자문하기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꽃이라 정말 다 좋아하지만은 않는 나를 안다. 속 깊이 그리는 꽃은 다만 하나, 북풍 설한을 이기고 피는 매화뿐인 것을 나는 진즉부터 알고 있다. 뭍 꽃들과 매화를 향한 나의 이러한 편벽은 어쩌면 근원(김용준, 近園 金瑢俊, 1904~1967)의 그것과도 참 많이 흡사하구나하고 무릎을 쳤던 적이 어림하여 수삼차례다.
근원은 매화를 특히나 좋아했다. 하면서도 그는 꽃이면 다 좋은 거지 어찌 매화만 좋으란 법이 있느냐고 반어를 썼다. 그러고는 곧이어 그는 대책 없이 매화만을 칭송하며 정이 드는 데야 무슨 조건이 필요하냐며 슬그머니 그 편애를 변명했다.
내가 가림 없이 이 꽃 저 꽃을 기웃거리게 된 이유 또한 이와 어슷하여 가슴속 깊은 곳에 치유되지 않는 아픔 하나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혹한의 한 겨울, 아끼던 매화가 어이없게 꺾여 내 뜰을 떠난 뒤로 나는 한동안 그 상실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섬섬초월(纖纖初月)의 요요한 겨울밤을 그 붉은 꽃 빛 어우는 암향에 아득히 젖어 희희낙락 하였던가.
그 뒤로 문득 매화가 그리우면 혹 어느 꽃이라 비슷한 향이라도 맡을까 허둥거리기도 하고, 절기 아니어도 고궁의 뒤뜰로 매화를 찾아 불쑥 나들이를 한다. 비록 매화 내 뜰을 떠나고 세월 또한 무정히 흘러 이제 그 뜰마저 사라졌어도 나는 여전히 매화를 못 잊는다.
지난 3월, 천리포수목원의 초가집 뒤뜰 울 옆 홀연 마주친 홍매의 그 타는 듯 붉은 열정이 문득 사무쳐 나는 이 만추의 계절에 다시 또 철부지로 고궁을 찾는다. 대조전(大造殿)뒤뜰로 매화를 보러간다. 하지만 매화는 필 염을 갈무린 채 자는 듯 무심하다. 거친 등걸로 외면하여 응달 속에 스스럽다. 하릴없이 돌아서 나오는 발길 저편, 낙선재로 이어지는 모퉁이에 영산홍 두어 송이가 애살스럽게 피어 가을궁이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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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이 풍부한 오작가의 봄은 산등성이
산책길의 꽃들로 시작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