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여행 단상
2015.05.15 12:59
제주여행
인사회가 기획한 2박3일 제주여행, 열여섯 동문이 한 사람 빠짐없이 김포공항 로비에 모습을 나타냈다.
남 동문 여덟에 여 동문 여덟, 공교롭게도 남녀 동수다. 오전 11시 30분 비행기, 그럴싸한 차림으로 나타나 서로 반갑게 인사한다. 일흔 중반 나이답지 않게 조금은 들뜬 분위기다.
이러저러한 모임이 있을 때면, 더욱이나 여행을 하는 때면 나는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고를 나온 아내의 동창모임이나 남자고등학교를 나온 대학 친구들의 모임이 흑백 TV라면 우리들의 모임을 컬러TV라고 해야 할 듯 우리에겐 묘하게 색채가 있다. 어찌 모임뿐이랴. 삶 자체에 색감이 스며있어 느낌부터가 다르다. 여행맛도 각별하다.
같은 연령대의 남녀가 함께 다니다보면 더러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두 차례나 그런 일이 생겼다.
첫날, 제주공항에 내려 버스로 한 시간 남짓 섬을 종주하여 동남쪽 끝 표선리로 이동해 해비치 리조트에 짐을 푼 일행은 쉬는 것도 마다하고 바로 숙소를 나와 인근 마을과 해변을 산책하며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구멍 숭숭 뚫린 울퉁불퉁한 돌밭을 거닐며 검푸른 바다를 향해, 물질하는 해녀를 향해, 멀리 지나가는 하얀 고깃배를 향해, 갯바위에 서서 낚싯대를 휘두르는 외로운 낚시꾼을 향해 부지런히 카메라를 들이댔다.
망사리에 딴 미역을 가득 담아들고 뭍으로 나온 해녀가 부러운 듯 우리 일행을 쳐다보며 방언 섞어 한마디 한다.
“촘말로 좋쑤다. 두가시(부부)들끼리 이렇게 여행도 함께 호난(하고) 사진도 박고. 촘말로 좋쑤다.”
이어 들어가 앉은 갯가 횟집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겼다. 시장기에 한창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리는 우리에게 마담이 따로 회를 한 접시 갖고 와 특별 서비스라며 내려놓는다.
“호호, 보기 좋네요. 이거 좀 드셔보셔요. 갈치와 고등어회예요. 금실 좋은 부부들이 제 집에 오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니까요. 호호.”
지금이야 대다수 고등학교가 남녀 공학이지만 내 고등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말에는 우리학교만이 유일하게 장안에서 남녀공학이었다. 한창 이성에 대해 호기심이 강하게 발동하던 때라 하얀 칼라가 달린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새침하게 교문을 드나들던 여학생들은 어느 누구랄 것 없이 남학생들에게는 모두 천사요 선녀였다.
지방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내가 남녀공학인 b고로 진학하게된 건 순전히 한 해 위 선배 때문이었다.
서울의 k고교로 가리라 목표를 정하고 있던 내게 응시원서를 쓸 무렵 학교를 찾아온 선배는 자기가 다니는 b고교를 추천하면서 s대 합격률이 대한민국에서 최상이라는 것과 서울에서 유일한 남녀공학이라는 것, 일주일에 한 번씩 남녀학생이 다 함께 강당에서 영화를 본다고 말해 그 당장 나의 진로를 k고교에서 b고교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등하교로 교문을 드나들 때마다,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할 때마다, 특별활동시간 남녀가 함께 운동을 할 때마다, 과목에 따라 남녀 합반으로 수업을 들을 때마다, 여학생 교실 특유의 냄새와 그녀들의 웃음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야릇하게 출렁거렸다.
그건 나뿐이 아닌 듯했다. 모두가 조금씩 과장되게 행동했고 필요 이상으로 목청을 돋우어 자신을 나타내려했다. 아니면 아예 수줍어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여 속을 감추든지···. 매력이 없거나 아름답지 않은 여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중에 우리는 서로를 견제하고 학업과 운동으로 경쟁하고 우정으로 공동전선을 쌓으면서 3년을 아슬아슬 분홍빛으로 지냈다.
그렇게 자란 사이들이라 우리는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한 숙소에 머물고 마주 앉아 먹고 곶자왈 숲길을 걷고 민속촌을 돌아보면서도 스스럼이 없었다. 오랜 기간 시나브로 든 정이 푸근하고 편안했다.
함께할 때면 우리는 모르는 새 연록새 싱그럽던 그 옛날의 五월로 돌아가 다시 사춘기가 된다. 하지만 세월로 다듬어진 예의와 존중, 배려로 한껏 신사도를 발휘한다. 은근한 설렘을 속에 감추고 능청스럽게 태연하다. 무례는 용서되지 않는다.
사춘기의 민감한 시기를 여학생들과 같은 교정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들은 대체로 세 그룹으로 성장했다.
보다 남성답게 자신을 키워 예의 바르고 남을 배려하는 바람직한 신사도를 지니게 되었거나 보다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는, 그러나 조금은 소심한 샌님 모범생이 되는 그룹. 일부는 분홍빛 감정에 마음이 흔들려 학업에 집중을 못하는 바람에 학교생활을 힘들게 겪은 동문들도 있다.
어쨌거나 이제 칠십 중반, 서로는 서로의 인생을 탓하지 않고 인정하며 너그럽게 품어 함께 어울린다. 성적매력이 덜해진 게 우정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듯싶다. 모이면 서로가 한결같게 자연스러워 좋고 부드럽고 따뜻해서 좋다. 또한 배려 깊어 아름답다.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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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윤
2015.05.15 12:59
기획 두목 이태영 회장, 교통과 숙소, 음식까지 일일이 최고로 섭외한 데 더하여 두 번씩이나 입과 배를 즐겁게 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어 모두를 감탄스럽게 한 김동연 동문, 신중하고 사려 깊은 동문의 부군, 거하게 점심을 쏘신 이은영 오라버님과 은영 동문. 조용하게 그 뒤치닥거리를 감당한 김영은 동문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미진한 여행 후기를 올립니다. -
연흥숙
2015.05.15 12:59
이번 여행을 순조롭게 잘 다녀 온 것은
그 중에 순둥이 한분이 있었던 연유겠지요.
글 재주 부럽습니다. -
오세윤
2015.05.15 12:59
함께 한 여행에 기쁨이 세배였습니다.
종종~ -
임효제
2015.05.15 12:59
와~
오 박의 여행기를 읽고,,
매조도 제주에 다녀 온듯,, 우쭐,, 반짝,, 했습니다
날씨도 따듯하여 더욱 즐거우셨겠습니다요 ^(^ -
오세윤
2015.05.15 12:59
매조를 모시고 가야 했을 여행인데-
성치 못한 몸이 안타깝소이다. ㅎ -
김영종
2015.05.15 12:59
처음으로 같이한 여행인데 있는듯 없는듯한
좋은 여행 이었다오
처음엔 작가와의 동행이라 좀은 낯설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보통사람이더이다 ㅎㅎㅎ
고마웠수 ..... -
오세윤
2015.05.15 12:59
풍부한 재담 덕분에 즐겁고 편안한 여행을 했다우.
6월이 기대됩니다요. ㅎ ㅎ -
박일선
2015.05.15 12:59
아름다운 글이라오.
나도 k고교 지망생이었는데
중학교 담임선생이 하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b고교를 칭찬하는 바람에 b고교로 바꾸었다오.
고교 지망 직전에 서울 시내 일류 고교들을 시찰하고 돌아온 담임선생이
b고교를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던 말 중에 기억나는 것은
남녀공학이라는 것과 '교실 화로 연통이 찌그러지지 않은 학교는 b고교가 유일'했다는 것이라오.
아마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왜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지 모르겠다오.
그러나 결정타가 되었던 말은 남녀공학이라는 것 같다오. -
오세윤
2015.05.15 12:59
비슷한 경우군요.
k 55회 명예회원이란 말 들었수.
시야는 넓혀야 풍류가 들고 사람은 익어야 참 멋임을 새삼 느꼈수. -
강창효
2015.05.15 12:59
역시 오작가의 필력은 대단하십니다..
구구절절, 참 아름다운 글이올시다..
특히 마지막 두줄 마음에 듭니다..
전무후무할지도 모를 인사회 제주 여행--그 여행의 귀한 기록입니다.. -
오세윤
2015.05.15 12:59
함께 할 줄 알았는데...
왜 아니 오셨나 내내 궁금했더랬소이다.
또 기회가 있겠지요. -
김영은
2015.05.15 12:59
오 작가님이 동행하여 좋다고 했는데
여행기를 읽고 나니, 역시 동행이 최고
였다고 생각됩니다.
과묵하게 있는듯 없는듯, 그러나 사려 깊은
글 솜씨로 우리의 분위기에 품위를 더해 주셨죠.
서로 서로의 덕분에 좋은 여행이 되었습니다. -
오세윤
2015.05.15 12:59
그렇찮아도 글의 제목을 '제주, 아름다운 동행'
이라 하려다 어짤까 하던 참이었지요.
영은 동문을 비롯한 여동들 덕분에 품위 있고 고상한 여행을 하게 되어
크게 의미가 있었습니다. -
김동연
2015.05.15 12:59
부고를 2년 다닌것이 큰 인연이었습니다.
인사회에 가입하지 못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늘 11 부고 인사회 덕분에 노년을 잘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오세윤
2015.05.15 12:59
느낌이 많은 제주 여행이었습니다. 동연동문 덕분이지요.
특히나 은정하고 고운 鄕邸를 방문하고는 감회가 더했습니다.
조용하고 큰 베품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진정 천하부고 여동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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