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함께하는 부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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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회상하며
2016.07.14 05:35
그러니까 1950년 6.26일, 월요일이였지요.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모두 바로 집으로 돌라가라고 하교를 시키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시장엘 다녀오시면서 물건들이 동이나고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고 걱정을 하시면서 쌀을 담그고 미숫가루를 만드시고 우리 일곱형제들의 겨울옷 상의 안쪽에 이름, 부모님 성함, 본적, 현주소를 꼬매 넣어 주시고 여느때보다 일찍 퇴근하시는 아버지는 과자봉다리를 한아름 안고 오셨습니다. 퇴근하시는 길에 명동의 과자집에 들려서 남아있는 과자를 몽땅 담아 오셨노라고 하시면서 아버님도 한발 늦었더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과자봉다리, 미숫가루 봉당리, 돈주머니를 만들어서 우리 형제들의 륙색에 각각 담아 주시고 모두 한자리에 불러 놓고 주의사항을 주셨는데 누누히 다짐하시기를 혹시 우리 가족이 해산되어 뿔뿔이 헤어지는 경우에는 순경아저씨를 찾아서 우리집 주소를 드리고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라고 일르셨습니다. 그리고 한여름인데도 겨울옷을 입힌 이유는 만약에 헤어져서 방황을 하더라도 따스한 옷으로 계절을 견딜 것을 계산하신거라고 설명을 하셨는데 우리들 어린 마음에도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난리가 어떻게 났는지는 우리가 어려서 설명을 해주시지 않았지만 안방 침대옆에 서재에서 큰 책상을 옮겨다 놓으시고 사방을 다다미로 막으시고 우리들에게 모두 외출복을 입히고는 륙색을 가진채로 침대밑과 책상밑에 자리잡고 밤을 지내도록 준비를 하셨지요. 부모님은 우리 어린 칠남매(만 13세 큰언니에서부터 8개월된 막내동생)에 일돕는 언니들 둘, 도합 9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길떠날 마음을 먹지 못하고 쿵쿵 포격이 머리위로 나르는 속에서 밤을 지새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6월 28일 새벽, 아침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나간 어머니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포탄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방으로 뛰어들어 오시자 당시 37세이셨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깨우시고는 조용 조용히 아버지 뒤를 바짝 쫒아오라고 소근거리셨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난리가 일어났음을 눈치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길로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커다란 륙색을 메시고 네살짜리 남동생의 손을 잡으시고, 36세의 우리 어머니는 8개월된 막내동생을 업고 쌀가방을 머리에 이시고, 열여덟살이였던 식모언니가 두살 반짜리 동생을 업었다고 기억합니다. 벽돌집 담밑을 따라서, 신작로 길을 건너고 어둑 어둑한 새벽길을 걸어가는 식구들은 우리식구 뿐만이 아니였습니다. 얼마를 걸었는지 한강이 보이고 강뚝을 따라서 걸어 가는데 머리 위로 날카로운 금속소리가 쌩쌩 지나가고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우리들 선두에 스셔서 “엎드렷!”하고 호령을 하셨습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미리 훈련을 받은 군인인듯이 구덩이쪽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지요. 때로는 거름을 준 호박구덩이기도 했지만 냄새고 쇠파리고 가리지 않았습니다. 한참 엎드려라, 빨리 움직여라, 명령하시는대로 우리는 열심히 따라가는데 어느 쩔뚝거리며 지나가는 군인을 만나자 아버지는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하셨는데 한 군인이 한강다리가 이미 끊겼다고 알려 주고는 그래도 한강물쪽으로 절름거리며 뛰어가는걸 보았습니다. 가다가 동생을 업고 가시던 어머니가 이고 가시던 쌀가방이 너무 무겁다고 길에 놓고 가려니까 그 뒤를 따라가던 아헙살인 제가 우리 배고프면 밥해먹어야 한다고 질질 끌고 따라갔던 기억이 납니다. 할수 없이 어머니가 쌀가방을 다시 머리에 이고 가는데 이미 해는 중천에 뜬 여름날 아침은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상황을 판단하시고 한강다리쪽으로 가기를 포기하시고 되돌아서 집으로 오기로 하시고 뚝밑에 자리잡은 어느 초가집 뒷담아래에서 주인의 부엌을 빌려 밥을 지어 먹고는 성신여학교 돌산아래 있는 돈암동 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 후 석달동안은 괴뢰정권 아래에서 무섭고 배고픈 생활을 이겨 냈지요. 돌이켜 보면 37세 청년 아버지가 어린 소대를 이끌고 얼마나 당황하고 당혹하셨을가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하기만 합니다. 또 유월 하순 여름날이였는데 겨울옷을 입고 아버지를 쫒아가던 우리는 조금도 더운 줄을 몰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륙색에서 꺼내어 먹었던, 아버지가 사오셨던 명동 제과점의 우유과자처럼 맛난 과자는 다시 맛보지 못했지요. 더 잊혀지지 않는 것은 쩔뚝거리며 한강쪽으로 홀로 뛰어가던 국군아저씨의 뒷모습입니다. ![]()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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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용
2016.07.14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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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완기
2016.07.14 05:35
박헌영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탱크 30여대를 구걸하여 벌려논
한국전쟁은 300여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탱크 한대당 30만명이
죽었다. 지금 제조되고있는 핵폭탄(수소폭탄)은 한방이면 5천만이
죽는다. 참외 에 민족의 목숨을 팔려는 성주군민들이여 핵폭탄 반대에
혈서를 써야지 참외좀 팔려고 혈서를 생각하는 것은 6.25를 또 자초합니다.
민족의 생사와 국가안보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얼간이 정치인은
자기전문분야인 의료업이나 제대로 챙기시오. 6.25가 또 터지면 병원이
더 바뻐질것입니다. 감사. -
김영은
2016.07.14 05:35
우리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어찌 잊으랴~~
만 2일간의 소용돌이를 정확한 기억으로 실감나게 표현했구나.
돈암동에 살던 우리는 미아리 고개에서 넘어오던 콩 볶듯 나던 총소리, 잊지 못하지.
이제는 다 떠나신 우리 부모님의 연세가 40도 안된 청년이셨는데
줄줄이 어린 식솔 거느리고 얼마나 놀라고 당황 하셨을까?
전쟁의 한 복판에서 아비규환의 끔찍한 고난 속에서 얼마나
힘 들고 외로우셨을까? 고생만 하고 살다 가신 부모님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전쟁의 참상을 모르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네글을 읽히고 싶구나. 철없는 정치인들, 멋 모르고 날뛰는 사람들에게도...
녹 슬지 않은 너의 진솔한 글 솜씨가 옛날을 더듬으며 눈물나게 한다. 승자야~ -
이초영
2016.07.14 05:35
승자야.
어느 가정이나 6.25 겪은 이야기는 몇권의 책으로도 부족할꺼야.
우리 부모님도 두분이 만 33세. 공군 창설때부터 재무장교셨든 아버지는
6.25 터지는날 공군본부로 가신후 남하하셨으니 우리는 6.25 적치하에
국방군 가족이란 신분이라 얼마나 가슴 조이고 떨면서 살았는지 몰라.
인민군들이 동네 어귀에 와서 이동네 국방군 아새끼들 가족없냐고 총부리를 겨누고, 잡아 오라고,
누구라도 가족들 숨겨주면 총살시킨다고 소리 질르곤했어.
다행히 이웃들이 좋은 분들이라 우리를 고발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오들오들 떨면서 지냈지.
숨어지내든 분이 지하실에서 방송을 듣고, 8월초에 서울시내 국방군가족 모두 총살한다는 뉴스룰 전해주어
서둘러 나는 48년생 남동생 업고, 엄마는 46년생 여동생 걸리고 보따리 머리에 이고, 밤에 도망 하다싶이
걸어서 굴레방다리 (아현동) 에서 추럭 같은차 타고, 신촌역까지 가서, 일산까지 하로 종일 걸어갔어.
북쪽으로 가면 감시가 덜하다고 해서 외삼촌 처가가 있는 일산인데 지금 일산이 그때 그곳인지
그때는 옥수수, 참외밭 밖에 본것이 없었어.
그곳에서, 옥수수, 참외 따 먹으면서 풀밭에서 놀다가 B29가 공습하면 논둑에 엎드리고, 그래도
서울서 처럼 가슴 조리지 않고 살았어.
서울수복 좀전에 서울로 돌아와서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니 무서워서 딴곳으로 가서 지냈지.
그러다가 중공군이 쳐 내려 온다는 말듣고는 여름에 떨면서 살든 두려움에 11월 말경에 대구로 피난갔어.
내 짝궁, 박 xx(이름도 가물가물) 아버지가 굴레방다리 시장에서 큰 유기점을 하는데
나한테 예쁜 사기종지, 접시, 많이 싸다 주곤 했는데 그때 헤어진후 한번도 못 봤으니
지금은 머리 허연 영감이 되었겠지.
승자야. 정말 66년전 일인데 어제 일 같이 기억에 생생하다. -
김승자
2016.07.14 05:35
우리 모두 여기서 각각 지니고 있는 옛날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 나누는것도 좋네요.
한장면씩 써서 모아 신정재씨에게 드리고 동창회보에 실어 달라고 하면 어떨가요? -
이광용
2016.07.14 05:35
난 1.4 후퇴 때나 피난 같지, 6. 25 때는 꼼작 못하고
있다가, 인민군 치하에 국민 학교에서 공부한 기억이
나네. 후암동에 있는 삼광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인민군이
훈련 하다, 휴식시간에 우리들에게 다정하게 이야기 해
주던 모습은, 9. 28 수복후 눈을 부라리고 총뿌리 들이대고
위협하던 국군의 모습과는, 내 어린 눈에는 크게 다르게 비쳐젔었지
김 선생을 비롯해, 여름용도 그렇고 기억력들이 탁월하네.
난 왜 다정한 인민군과 무서웠던 국군만 기억이 날가? -
이은영
2016.07.14 05:35
승자야 반갑다. 너의 가족 항상 좋아 보인다
나는 혜화 국민학교때 돈암동까지 밥도 못먹고
빨갱이 노래하면서 부역까지했는데
죄없는 사람은 괜찮다는 부모 말씀을 클때까지 원망했다
나는 우리아이들 전쟁 나면 피난부터 간다고 마음 먹고 살았다 -
이태영
2016.07.14 05:35
6, 25에는 경기도 광주까지 피난 갔다가
북한군이 우리를 앞지르는 바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있다가
학교에 나가서 김일성 찬가를 배웠던 생각이 나는군요
그 때가 국민학교 5학년이었지요. -
민완기
2016.07.14 05:35
6.25때 점령군인 공산군이 비교적 온유한 척 함에 비해 9.28수복국군의
굳은 자세는 속고 배신당했던 경험이 있는 이에게는 의 례껏
있을수있는 일입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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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꿍 꿍 ~ 꾸광꾸광 ~'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라디오에서는 남자 아나운서가 황급한 목소리로 뉴스를
전하면서 " 지금 개성쪽에서 대포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인민군이 남침을 시도하고 있는듯 합니다."
저는 곤히자고 있는 아버지를 깨우면서 계속 뉴스를 듣고 있었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 방송에서는 계속 " 국군 장병 여러분 ! 서둘러서 원대복귀 하시기 바랍니다."
아침 10시쯤 밖엘 나가니 여러대의 6톤차에 육군들을 꽉 싣고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6월27일.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주머니에 쌀을 빠아 가루를 만들고 하여 남동생과 세 사람은
서울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할아버지댁을 향하여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 두 사람은 집을 지키기로 하고 서울에 남고.)
완행열차는 수많은 피난민을 싣고 열심히 남으로 달려가고, 라디어에서는 아나운서가 낙랑한 목소리로
" 지금 인민군들은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고 있습니다." ㅡ 이렇게 일어난 전쟁이 3년을 끌 줄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