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막 채소가게
2016.09.11 17:32
천막 채소가게
버스정류장 곁에서 내몰린 채소가게가 다리 건너 다른 아파트단지 뒤 작은 모서리공터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아파트 뒷담에 기대어 천막을 치고 앞에 발을 느려 서향 볕을 차단했다. 처음 한동안은 찾는 사람도 적고 물건도 빈약해 허섭하고 어설펐지만 여름 들어 갖가지 채소가 풍성하게 놓이고 단골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다시 이전 모습을 되찾았다. 더욱이나 다행스럽게도 곁에 구두수선점이 들어서 이웃이 된데다 넓이도 한 평 반에서 두 평 남짓으로 넓어져 안쪽으로 제법 넉넉하게 공간도 생겼다. 가게 앞 인도도 새로 포장되어 산뜻해진데다 도로에도 차가 적어 시끄럽지 않았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운치 있게 올라와 지나는 사람들의 귀를 한결 느긋하게 풀었다.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천막 안엔 항상 두세 명에서 많게는 대여섯 명의 마실꾼들이 앉아 마늘을 까거나 고구마줄기나 도라지 껍질을 벗기며 두런두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3년차 단골이 되면서 나도 그들 마실꾼들 -나는 이 70대의 아주머니들을 노치원생이라고 부른다. - 과 친숙해져 가끔은 바깥쪽 한 귀퉁이에 앉아 그네들의 수다를 듣기도 하고 음식을 대접받으며 임의롭게 어울렸다. 처음엔 머리 허연 남자가, 등치도 적지 않은 남정네가 떡 버티고 앉는 꼴이 수상해 머뭇거리던 낯 덜 익은 아주머니들도 기왕의 동료들이 스스럼없이 웃고 말하는 분위기에 안심이 되어 경계를 풀고 흔연히 속을 열었다. 가게 안엔 변변하게 앉을 자리도 없었다. 자리래야 색 바랜 앉은뱅이 붉은 목욕의자 두개와 막걸리상자 하나, 손잡이를 빼어버린 못 쓰는 냄비, 함지박, 그리고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고작이다. 주인아주머니는 엎어 놓은 상자와 냄비, 쓰레기통 위에 애기방석 비슷한 걸 얹어 놓고 마실꾼들을 앉힌다. 아무도 그 위에 앉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한 구석에라도 끼어 앉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아주 흐뭇한 표정들을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앉는 접이식 낚시의자만이 그래도 가게 안에서 그중 그럴듯한 앉을 거리였다. 남편이 낚시를 다닐 때 쓰던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가면 주인아주머니는 그 낚시의자를 내게 내어주고 곁의 엎어 놓은 작은 함지박으로 물러나 앉았다. 월남전 참전 상이용사인 남편이 일생 변변한 직업을 못 갖고 낚시로 세월을 보내다 60을 넘기면서야 한을 잠재우고 함께 꾸린 게 이 가게라고 했다. 매일처럼 남편이 새벽같이 일어나 1톤 트럭을 몰고 도내의 무 농약 농가를 찾아다니며 그날그날 거둔 싱싱한 것들을 직접 받아온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아침이슬 젖은 상추를 쌈으로 먹고, 별빛에 익은 토마토를 상큼하게 맛본다. 아내는 갓 딴 호박으로 고추장찌개를 끓이고 싱싱한 오이로 냉국을 만든다.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고는 맛보지 못하는, 그날 딴 여린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호사를 누린다. 풋고추가 상에 오르면 그 달큼하고 풋풋한 생감에 다른 반찬엔 손도 가지 않는다.
70대 노치원생만 있는 것도 아니다. 주인아주머니가 60 초반이어서인지 사람을 가리지 않아서인지 더러는 50대 아주머니도 들앉고 때로는 80을 훌쩍 넘긴 파파 노친네도 동참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게 안에는 가지가지 사연들이 꾸미고 감추는 것 없이 끊이지 않고 너나든다. 오늘 새참은 쫀득하게 씹히는 삶은 감자, 두 개째를 집어 들어 껍질을 벗기면서 나는 활짝 두 귀를 연다. 무릎이 아픈 구황댁을 위로하는 안성댁의 수술 경험담. 딸의 효심을 고마워하는 완주댁의 손자 자랑. 10년 째 시모의 병수발을 드는 중 늙은 며느리의 애증담긴 이야기. 그 중에도 아주머니들은 많이 배우지 못한 걸 제일 한스럽게 이야기한다. 나는 마실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엉뚱하게도 수필을 생각한다. 시골에서 자라느라, 어렵게 사느라, 부모들의 봉건적 남존여비 사상으로 겨우 초등학교만을 마친 아주머니들. 기왕에 수필을 쓸 바에는 그런 아주머니들이 어렵지 않게 읽어 공감하는 수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시나브로 가슴 젖는 슬픔이 있고, 싱긋 웃음 짓게 하는 온기가 있고, 아침녘 들길에 핀 메꽃 같은 순정이 있고, 슬며시 손을 잡고 등을 다독이는 위로가 있는 글. 그렇듯 그네들의 감성을 깨우고 숨 쉬게 하는 수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살아온 날들이 모두 수필이요 그들의 꾸밈없는 감정과 삿되지 않은 의식이 정녕 수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수필이 꼭 지식인만의 심오한 지성적 글이어야 할까. 난蘭 과 학鶴처럼 고결해야만 할까. 다듬어 건네주는 파 한 단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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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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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은
2016.09.1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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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윤
2016.09.11 17:32
하하,
과찬이 기분좋은 아침입니다.
그렇찮아도 다시 또 책을 낼 수 있을까 싶어
발표된 글을 여기 가끔 올릴까 하던 중이지요.
동문들이 불편해할까 걱정도 되지만 영은, 동연 동문처럼
반가워할 고마운 독자도 계실테니 용기를 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동연
2016.09.11 17:32
동네 천막 채소가게에서 세상 이야기 듣고
삶은 감자도 얻어 먹으면서 세월을 잘 보내고 계시군요.
신선한 채소와 과일뿐 아니라 마실나온 아주머니들의 애환도 듣고
얻는 것 뿐인 삶을 살고 계시네요. 부럽습니다. -
오세윤
2016.09.11 17:32
늦게도 주무시네요.
서울로 오신다고요?
반가우면서도 어느 한 구석 애석하군요.
길 위에서의 생각/ 류시화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사람은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 가는 자는 더 살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박일선
2016.09.11 17:32
이제 보니 내가 이번 자전거 여행에 가져가서 요긴하게 쓴 것이 접이식 낚시의자였군.
나는 뭐라고 부르는지 몰라서 소형 캠핑의자라고 불렀는데. 덕분에 배웠네.
수필 잘 읽었네. 우리 아파트 단지의 "선이네 야채가게" 생각이 났네.
수년 동안 소형 트럭으로 하다가 가게를 차렸는데 잘 되는 모양이네.
트럭으로 할 때는 아주머니 혼자 하더니 이제는 아저씨, 아들, 딸까지 함께 하는 모양이 좋더군. -
오세윤
2016.09.11 17:32
낚시를 좋아한 덕에 안거지.
지금도 차 트렁크에 갖고 다닌다네.
어쩌다 야외에 나가면 길가 좀 들어간 곳에 펴놓고 앉아
멀건히 폼을 잡지. 마치 지가 뭔 시인이나 되는 것처럼.
이제 정리해 여행지를 낼 따가 되지 않았나? -
이태영
2016.09.11 17:32
아, 아름다운 글입니다.
마치 나도 천막 채소가게의 객들 틈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네요
읽어 내려가면서 글 속으로 푹 빠졌습니다. -
오세윤
2016.09.11 17:32
고맙습니다.
사려 깊은, 고급 독자를 한 분 확보한 느낌입니다.
시월부터는 인사회도 나갈 틈이 생길듯 합니다.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
이문구
2016.09.11 17:32
병상에 누워 내일의 수술을 은근히 걱정하던 중
핸드폰의 작은 글씨 눈을 비벼가며 장하게도
오박의 정겨운 글을 꼼꼼히 다 읽어 냈다오.
그러면서 남다른 자상한 마음과 섬세한 안목이
있어야 과연 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이다.
평소에 나는 천막 채소 가게는 관심도 없었으니... -
오세윤
2016.09.11 17:32
글씨가 크더라도 이젠 읽는 게 수월찮은 나이,
더구나 몸이 편치 않으면 더 싫어지는 책읽기.
그러면서도 읽었군요. 애쓰셨습니다.
마음이 담대하고 고우니 수술도 잘 이겨낼거라 믿소이다.
곧 인사회에서 뵙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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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치원생을 통한 삶의 애환까지 한편의 에세이다.
오세윤 작가는 큰 글쟁이 임이 틀림없다.
우리 일상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채소가게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인정이 흐르는 동네 사랑방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끼고 싶게 만든다.
읽는 사람을 미소 짓게하는 이러한 글 재주를 많이 보시함이 어떨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