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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2016.09.17 22:00

오세윤 조회 수:203

 

꽃자리

                                                          

                                                                                                            오세윤                         

                                                 

  “원장님, 편지요오~.” 

  두툼한 편지를 전하는 간호사의 말투가 야살하다. 보일 듯 말듯 돌아서며 흘리는 웃음이 시쿰하다.

참, 하루도 건너지 않는군. 모르는 척 나는 편지를 그냥 서랍 속에 넣는다. 가운을 걸치고 환자부터 진료한다.

  발신인불명 편지를 받기 시작한 지 두 달째, 한 주에 두 통씩 온다. 화요일과 금요일, 날짜도 정확하다. 또박또박 쓴 글씨가 단정하고 예쁜데다 문장도 수려하다. 맞춤법도 틀린 데 하나 없다. 국어과 출신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닌가 추정도 해 보지만 내 진료실에 드나드는 아기엄마 중에 아직 그런 분은 없다. 날이 갈수록 궁금증이 더해갔지만 들어내 놓고 탐문할 일도 아니어서 못 받은 척 시치미를 떼고 진료에만 전념했다.

   


 전문의과정을 마친 나는 당시 모 국립병원에 새로 개설된 소아과에 봉직하며 개인의원 개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친의 바람이기도 했고 아랫사람을 가르치고 거느리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나 자신의 뜻이기도 했다. 퇴근 후에는 집 위층에 진료실을 차려 놓고 야간에 환자를 돌봤다. 편지가 오기 시작한 건 야간진료실을 차린 지 두 해째에 접어든 늦은 봄 무렵부터였다.  

  편지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그립다고 했다. 오매불망 그립다고 했다. 목련꽃 더불어 피어난 그리움이 모란이 져도 가실 줄을 모른다고 했다. 음악을 들으면 그리움이 사무쳐 요즘은 오디오도 멀리하고 지낸다며, 시 조차도 읽지 못한다고 했다.

  처음엔 잘못 배달된 편지인 줄 알았다. 주소를 착각하고 써서 부친 줄 알았다. 하지만 k 구 h 동 하는 주소며 오 아무개 원장님 귀하라고 쓴 내 이름도 글자 하나 틀린 곳 없이 정확했다. 진료하는 내 모습도 정확하게 표현했고 진료실의 내부 정경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병원 내에 흐르던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너무 좋아 대기실에 한참이나 앉아 듣다 왔다는 이야기라던가 책상 위에 읽다 놓아둔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가 궁금해 자기도 영풍문고에 나가 구했다는 이야기 등. 엊그제 장미 꽃꽂이는 조금은 덜 세련되어 병원 분위기엔 어울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다 실제에 부합했다.

  

 

 그 무렵 엄마들 사이에는 꽃꽂이를 배우는 게 유행이어서 개중에는 자기가 만든 작품을 병원에 들고 와 장식하거나 쓰고 남은 꽃을 화병에 꽂아놓기도 해 진료실엔 늘 꽃이 있었다. 하여 나는 그런 엄마 중 한 사람이 편지를 보내는가 싶어 내밀히 살피기도 했지만 누구 한 사람 의심이 갈만큼 어색해하거나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굴까. 

  누군가가 날 놀려주려 그러는 건가도 생각해 보았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 법, 할 일이 하도 없어 낚시질하는 사람 뒤에 죽치고 앉아 하루해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스톱 판에서 갖가지 심부름을 하며 밤을 새우는 사람도 있으니 불면증에 시달리며 잠 못 드는 그 긴 밤에 사랑을 상상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그런 글은 상대를 설정해 놓아야 그럴듯하게 엮어지는 터라 모르는 새 내가 눈에 띄어 그 대상이 된 게 아닌가 싶었다. 편지는 반년 나마 이어졌다.

  가을 들어 드디어 선친이 기왕에 마련했던 인천의 병원부지에 건물이 완성됐다. 인천은 선친이 학창시절을 보낸 연고지이기도 했고 수복 후 우리 가족이 살던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이주를 결심했다. 야간개원한 지 3년이 지나서였다.

  

 

 이사하는 날, 짐을 다 내보내고 쉬는 중에 한 단골 아기엄마가 층계를 올라오더니 그동안 고마웠다며 포장된 선물 하나를 내밀고는 황급히 돌아서 내려갔다. 평소 말수가 적고 조신해 대하기가 스스럽던 새내기 엄마였다.  

  창틀에 기대어 포장을 뜯었다. 곱게 수놓은 손수건 두 장과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 시집 갈피에 편지 한 장이 끼어 있었다. 낯익은 글씨였다. 생각지도 못 한, 발신인은 전혀 엉뚱한 엄마였다. 마지막 편지였다.

  피는 듯 꽃은 그렇게 졌다. 30년이 지나 나는 우연하게도 지인의 막내아들 혼례식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예식장에 들어서 하객을 맞고 있는 신랑 부모에게 걸어가는 나를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어머나! 선생님.”

돌아보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신부 어머니. 금세 알아볼 만큼 모습이 여전한 먼 전날의 아기 엄마.

  곁에 선 남편에게 나를 소개하며 발갛게 볼을 붉힌다. 연분홍 치마 모란꽃 수가 하느작 흔들렸다.

  마음 다스림이 온전하지 못했던 젊은 날, 여인이 당긴 시위를 무모하게 놓고, 내가 잘못 날아온 화살을 맞았더라면 서로의 오늘이 어찌 되었을까. 오늘의 이 기쁨이 가능했을까. 30 이쪽저쪽이었을 새내기 아기 엄마, 어느 사이 이순 耳順을 바라보는 앳된 장모의 자태가 곱다. 뒤안길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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