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기(2016. 9.20) 의미부여의 실행
2016.09.20 06:35
Y야, 너한테 이런 글을 쓰려니 내 기분이 영 아니다.
Y야, 너의 치매가 나에게 이런 허탈감을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조차 못했다. 더 답답한 것은 네가 이 글을 읽더라도 나를 기억하여 나한테 화조차 낼 수 있을 것이냐를 생각하면 그렇다. 아마도 너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먼 산이나 쳐다볼 것 같아서 그렇다.
꼭 60년 전으로 돌아가자. 내가 중학교 3학년 1학기 초, 반이 바뀌면서 다른 전주 토박이 애들이 네가 서울에서 온 놈이라고 하면서 영어도 잘 할 거라고 해서 내가 먼저 너에게 접근했었다. 너는 말씨부터 전라도 사투리, ‘OO냐?’가 아니고, 서울 말씨 ‘OO니?’였다. 사실 신기함보다 하루라도 빨리 전주를 탈출해야 하는 나에게는 목적지, 서울에 관한 막연하지만 여러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정보통으로서 너는 제격이었다. 그때 나의 이런 사정을 부고 동창 중에서 딱 한 사람이 금년 초에 다른 사건으로 알게 되었다.
너하고는 한 번도 다툰 일 없이 마침 우리 집에서 가까이, 약 300m에 네가 살고 있어서 친하게 지냈다. 지금 생각하니 너는 거의 모든 일에 소극적이었다. 거의 내가 하자고 해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미술반에 들어가서 나와 함께 그림 그리러 다니자고 했을 때, 너 자신도 너에게 그런 솜씨와 미술에 흥미가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너와 나의 왼손 손목에 문신한 것도 내가 하자고 꼬드겨서 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누구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커서 시계줄로 가릴 수 있게 거기에 하자는 것도 내가 한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시는 너의 어머니는 나를 모범생으로 여기고 너와 똑같이 대해주셨다. 1학기 말, 여름방학에 너의 형(사대부고 9회)이 전주에 내려와 있을 때, 내가 먼저 너에게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려고 준비한다고 용기를 내어 고백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하자고 했다. 그리고 네 형의 추천으로 이름도 생소한 ‘국립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채점 미스로 진학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때 너희 형제들이 자취하던 서울 용두동 집은 나에게는 피난처였다. 의지할 데 없는 나에게 큰집 같은 곳이었다. 굶고 잘 데 없을 때에는 너희 셋방으로 쳐들어가서 하루 저녁 신세를 지고 나온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누나, 형, 누이동생도 나를 형제로 여겨주었다. 그래서 한 방에서 같이 잤다. 이때 진 빚, 은혜가 너무 커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단언컨대 네가 없었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없었다. 나는 서울에 아주 먼 친척도 없었다. 1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 동가숙(東家宿) 서가식(西家食)했으니 말이다.
벌써 한 5년이 지난 모양이다. 네가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다녀 온 뒤 나는 혼자 울먹였다. 특히 상처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병수발을 들어줄 마땅한 사람도 없는 처지라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수술이 잘 되어 퇴원하고 지난달까지 한 달에 한 번 너를 데리고 나가, 네가 먹고 싶어 하는 점심을 꼭 챙겼다. 우리 집 사람이 나보다 더 챙겼다. ‘야, 임마. 나는 500만원짜리 모닝 타고 다니는 놈이야. 너는 거, 비싼 일식 장어요리, 칼치 조림, 대방동의 유명하다는 보신탕 집 등을 나에게 소개시켜 주었는데, 나는 의식적으로 밥 값이 별 거 아닌 것처럼 허세를 부렸어. 너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그랬어.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도 짜장면이 최고인 놈이야. 혼자서는 불고기 백반도 사서 먹지 않는 놈이야.’
치매가 무섭다. 지금의 내가 너를 알아 볼 수 없게 된다면 허무(虛無)함조차도 사치가 될 것이다. 엄격히 말해 ‘무서움’도 무엇을 기억해서 알고 있어야 느껴지는 것이다. 아직은 내가 치매 끼가 없어서 그런 무서움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무서움을 떨쳐내기 위해 어느 ‘명상록’에 나오는 말을 쫓아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목적도 없이 마구 자신의 힘을 낭비하면,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는 말에 철이 들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을 시작한다. 한자교육을 위한 학습자료를 개발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또 해야만 할 일을 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가벼워 진다. 끝까지 읽어준 동창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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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박교수는 남 모르게 아름다운 미덕이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