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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쪽회'에 개근을 하다

 

드디어 그 날이(2/28) 왔다. 사실 아침부터 좀 흥분돼 있었다.
어떤 남자애들일까? 만나면 얼마나 어색하고 쑥스러울까?
약간의 흥분과 호기심을 가지고 나갔다.
벌써들 와 있었다. “얘가 심영자예요.” 박수갈채를 받으며 들어갔다.
순간 실망을 했다. 내 부푼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거기 앉아 있는 남학생들은 빡빡머리 童顔이 아니라, 머리 허연 영감들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무엇을 들여다보고 내 얼굴을 힐끔거리며,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알고 보니 사려 깊은 친구가 졸업 앨범을 복사해 가지고 와서,
사진 속의 얼굴과 지금 들어온 얼굴의 닮은비를 계산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어디 누구야? 그래 눈은 똑 같다.”
“어머, 이의일씨는 하나도 안 늙었어.” “이것 봐 이삼열 소년, 어머 너무 귀엽다.”
사진 들고 맞선 보러 나온 시골 처녀 총각들처럼 마주 앉아서 부지런히 힐끔거리며,
얼굴과 이름을 확인하느라 한참 정신 없었다. 자못 흥분된 얼굴들이다.
그 날은 37년의 세월을 이렇게 껑충 뛰어 넘었다.
먼저 이 기발한 발상의 주인공 현형규, 양은숙에게 박수를 보내며 술잔을 부딪쳤다.
'위하여! 계집애들이 밤에 남학생들하고 음식점에 모여 앉아,
키득거리며 술까지 마셔!'
지하에서 이수복 선생님이 아셨다면 당장 퇴학감이다.
'正一品'에서 격조 높은 음식을 먹고 2차까지 갔다.
밤늦은 시간에 호텔에 가서,
외간(?) 남자들과 어울려 live song을 곁들여 가며 마오타이를 마셨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이것도 남녀공학을 한 덕이 아닌가?
'I can’t stop loving you'의 애절한 멜로디가 다 늙은 가슴을 파고든다.
60년대 초반, 그 젊은 날에 이 한마디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흘리고 온 우리들의 젊은 날이 흐릿한 불빛 속에서 아른거렸다.
밤 열한 시가 다 되어, 그것도 외간 남자의 차를 타고 집 앞에서 내렸다.
경비 아저씨의 앞을 당당히 지나서 현관의 벨을 눌렀다.
머리 허연 남편이 열어 줬다. 난생 처음 나는 남편 앞에서 간 큰 여자가 돼 봤다.
3월 9일 토요일 바람이 몹시 불었다.
명동 성당 그 자리에서 그 날의 그 얼굴들이 사진을 박는 날이다.
바람 부는 계단에서 흰 머리와 옷자락을 펄럭이며 포즈를 취하는 우리 늙은이들에게,
결혼식 하객들이 자리를 비켜 줬다.
시골 노인방의 노친네쯤으로 여기는 눈길이다.
점심으로 김종년씨가 짜장면을 사 줬다. 우리는 굳이 옛날 짜장면을 고집했다.
그 시절 그 쫄깃쫄깃한 짜장면이 얼마나 맛있었던가! 중국집 특유의 좁은 골방에서,
몸을 비비고 앉아 다정하게 먹었다.
“종년이 있으니 시키기만 하세요” 김종년씨가 익살을 떨며 웃겼다.
그런데 그 날의 그 사진이
경향신문 주말 매거진(3/29) 일 면을 가득 메운 이변을 낳고 말았다.
덕분에 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처음으로 매스컴을 다 타봤다.
세 번째 모임은 긴급 소집이었다(4/2). 극성스런 양은숙이 그 신문을 200부나 구입해서,
그 날로 사진과 함께 그걸 배부해 주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황원 신혜숙 회장단의 왕림. 우리 모임에 격려차 왔다지만 선망의 눈빛이 역력했다.
이황원 회장의 간략한 맥주 강의를 들으며 cass를 쭈욱. “맥주는 cass로!”
모임이 회를 거듭할수록 역사 속에 감춰줬던 秘話가 쏟아져 나왔다.
남의 도시락 속에서 달걀을 한 달 동안이나 꺼내 먹고,
두 손 들고 벌섰다는 개구쟁이 김종년,
합반 수업 때 이문구 도시락에서 두부 꺼내 먹고,
편지 써 넣고 왔다는 깜찍한 여학생 장온상,
앨범 위원 이문구를 구워삶아 양은숙 옆에서 사진 찍게 됐다는,
37년 전의 짝사랑을 이제야 실토하는 수줍은 소년 현형규.
이런 쪽회가 아니면 어디서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동창회니 반창회니 많은 모임이 있지만, '쪽쪽회'라는 말은 처음 들어 봤다.
앨범의 같은 쪽에 실린 얼굴들의 만남, 이름하여 '쪽쪽회'
그런데 어감상 어쩐지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이삼열씨의 철학적 소견에 따라,
우리 나이에 걸맞게 '명동쪽회'라고 세 번째 모임에서 개명을 했다.
50이 저만큼 넘도록 달리기에 열중했던 우리들,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짧아진 우리들,
이 쪽회가 모쪼록 소중한 우리의 남은 날들에 활력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영자야, 우리 명동쪽회 OO에서 O월 O일 O시야. 알겠지? 꼭 나와.”
양은숙의 밝은 목소리가 또 기다려진다. 1996. 4. 4

글/ 심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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