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함께하는 부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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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글 [ESSAY] 저기, 언니가 간다
2021.09.28 13:21
[ESSAY] 저기, 언니가 간다
“안되세요” 카페 직원에게 거절당한 초로의 여성, 잡상인인가 했더니
흰 노트북 내밀며 “내일 문화센터 ‘줌’ 미팅인데…” 수줍은 도움 요청
초롱한 눈, 배움 갈급한 용기… 65세 그녀, ‘할머니’ 아닌 ‘언니’였네“저는 그런 거 할 줄 모르세요.”
커피를 존대하는 걸로도 모자라 본인을 높이기에 이른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계산대 앞에는 아주머니라 부르기에는 다소 애매하고, 할머니라 부르자니 어쩐지 송구스러운 초로의 여성이 쭈뼛거리고 있었다.고개를 돌리지 않는 나와 걸음을 돌리지 않는 그녀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그녀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즈… 즈어기요오오옹….” 탤런트 김애경 뺨치는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나는 그만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일러스트=이철원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이제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 든 것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희고 납작한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노트북이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생의 따가운 눈총을 온몸으로 견뎌 내며 나에게 한참을 하소연했다.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요약해 보자면 이러하다. 문화 센터에서 ‘줌’으로 화상 회의하는 방법을 배워서 내일 아침 사람들과 온라인상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바탕화면에 깔아 두었던 프로그램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고 한다.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 보려 무던히도 애를 썼단다.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우스까지 고장이 났고, 손에 익지 않은 트랙패드를 사용하다 보니 자꾸만 쥐가 나서 더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물어볼 데는 없지, 밤은 깊어 가지,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쩔쩔매다가 옳거니! 카페에는 젊은 사람이 많으니 노트북을 들고 무작정 나와 봤다는 것이다. “제가 육십다섯이라 이런 거에 어리숙해요. 바쁘시겠지만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나이 든 것이 죄라도 되는 양 고개를 떨궜다.
“저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나는 말끝을 흐리며 노트북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스승에게 귀한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두 손을 배꼽 언저리에 가지런히 모은 채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딸깍 소리를 내며 이것저것 클릭할 때마다 아아 감탄으로 화답하는 그녀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힐끔거렸다.눈가에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은 젊은이의 그것과 다름없었고,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깨달음의 기쁨으로 입가에 번져 있을 미소 또한 여느 청춘과 마찬가지로 싱그러울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오밤중에 노트북을 품에 꼭 껴안고서 거리로 뛰쳐나오는 용기, 낯모르는 아랫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용기, 무시에 가까운 거절을 당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도움을 청하는 용기. 이 모든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샘솟은 것일까. 그건 아마 그녀의 마음 역시 젊은이만큼 뜨겁게 불타올랐기 때문이리라.그렇게 한참을 뚝딱거리고 나서야 바탕화면에 카메라 모양의 아이콘이 생겨났다. 낯익은 아이콘을 발견한 그녀는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염려스러웠는지“그러니까 제가 컴퓨터를 껐다가 켜도 이건 그대로인 거죠?내일 아침에도 여기 있는 거 맞죠?” 하고 거듭 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확답을 들은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탄산수 한 병을 기어코 쥐여 주었다.영업장에서 작은 소란을 피운 것이 미안했는지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하며 사과를 갈음하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곱기도 참 고왔다.
창문 너머 저 멀리로 아주머니라 부르기에는 다소 애매하고, 할머니라 부르자니 어쩐지 송구스러운 그녀가 간다. 옆구리에 새하얀 노트북을 끼고 한 손에는 커피를 든 채 그 누구보다도 밝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제법 대학생 같기도 하다.내가 그녀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부르기 어려워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저기, 언니가 간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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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선
2021.09.2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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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
2021.09.28 22:40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수가 있구나.
나도 노트북이 서투를때는 금방 있던 아이콘도 않보이고 다급해지면
뭐가 그렇게 다급한지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지.
그까짓 컴퓨터가 뭐라고 애간장을 태우노.
내마음이 다 짠 하구나.
65세면 정말 언니지 언니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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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2021.09.29 20:30
환갑이 넘은 언니의 용기가 깡 수준이네요 남의 일 같지 않은 내용입니다.
가르쳐주고 배우는 과정에서 언니의 표정을 상상하며 읽어내려가니 아주 재밌네요
코로나 유행으로 비대면이 되다 보니 국민학교 공부도 줌을 이용,
처음에는 엄마들도 줌을 배우느라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새로운 풍속이 많이 생겼지요
거리에는 스타벅스 커피잔을 들고 걷고 있는 젊은이들,
유명 카페에 가면 대화하는 사람보다는
컴퓨터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유행이고 보편적인 시대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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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2021.09.29 21:21
태어날때 부터 휴대폰이 있었던 세대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으니...
그들을 부유하게 잘 태어나게한 노년세대들은 세상밖으로 밀려나는 거지.
밀려나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배우는 언니와 오빠가 많아.
부끄러워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다가는 "IDIOT" 취급을 받게되지.
아무튼 노인들의 고난의 행군은 앞으로도 계속될거야.
재미있는 글이 위로가 되는구나. 그나마 인사회의 우리들은 그래도 좀 낫다고
자위하면서 더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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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저기 오빠가 간다."는 좀 어색하게 들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