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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투어' 타고 떠난 서부산 근현대 시간 여행

버스 타고 구불구불 산복도로 달리고…

피란수도 흔적 따라 뚜벅뚜벅 걸었다

박근희 기자/조선일보

 

 

채도가 높은 집들이 빼곡하게 자리한 '감천문화마을'은 구한말 부산항을 기반으로 살던 일본인 이주민들이 산을 개간해 지은 집에 6·25 때 피란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생긴 산복마을이다. 처절하고 억척스러운 삶의 흔적은 시간이 흘러 부산 여행의 명소가 됐다. 감천문화마을이 액자 속 그림처럼 보이는 '카페 아방가르드'.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채도가 높은 집들이 빼곡하게 자리한 '감천문화마을'은 구한말 부산항을 기반으로 살던 일본인 이주민들이 산을 개간해 지은 집에 6·25 때 피란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생긴 산복마을이다. 처절하고 억척스러운 삶의 흔적은 시간이 흘러 부산 여행의 명소가 됐다. 감천문화마을이 액자 속 그림처럼 보이는 '카페 아방가르드'.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부산이라는 도시를 꽤 안다고 생각했다. 이국의 해변을 연상케 하는 해운대와 광안리, 근사한 호텔과 대형 카페들이 수놓은 기장과 영도…. ‘부산’ 하면 푸른 바다 위 요트, 해변을 따라서 오가는 앙증맞은 모노레일부터 떠올렸다. 매일 순위를 갈아치우는 ‘핫플’은 꿰고 있었지만, 6·25전쟁 당시 부산이 1023일 동안 ‘피란 수도’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지냈다.

 

지난해 12월, 부산에 남아 있는 피란 수도의 핵심 유산 9곳(경무대, 임시 중앙청, 아미동 비석 피란 주거지, 국립중앙관상대,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 부산항 제1부두, 우암동 소막 피란 주거지, 유엔묘지, 하야리아기지)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피란 수도의 중심지였던 서구 일대, 서부산 명소들을 경유하는 시티투어 노선을 타고 ‘서부산 시티투어’에 나섰다. 버스는 마치 타임머신처럼 가슴 아프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근현대의 풍경 앞에 멈추곤 했다.

 

◇원도심·서부산 12 명소 잇는 시티투어

 

“서부산은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이야기가 많이 숨어 있는 곳이에요. 가덕도가 서부산 강서구인 것도 최근에 알았다는 부산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떠들썩한 관광 명소는 적지만, 역사와 자연을 두루 만날 수 있는 ‘서부산 힐링 코스’로 안내합니데이~.”

 

지난 17일 오전 9시 20분, 서부산 시티투어 버스가 출발하자 부산시티투어 가이드 한명희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승객이 드문드문 앉은 버스엔 내국인 관광객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 눈에 띄었다. 한씨는 “서부산 노선은 부산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중장년, 노년층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탄다”며 “‘핫플’ 코스가 많은 노선에 비해 인기가 적은 게 사실”이라고 했다.

 

그동안 해운대(레드 라인), 태종대(그린 라인), 해동용궁사(블루 라인) 방면 등 동부산과 해안선 중심으로 달렸던 시티투어 버스와 달리 ‘오렌지 라인’이라 불리는 서부산 시티투어는 산동네들을 이은 ‘산복도로’를 비롯해 부산의 옛 풍경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사하구·서구 일대를 아우르는 서부산권 특화 노선. 매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 20분부터 1시간 간격으로 부산역에서 출발해 순환한다.

 

 

감천문화마을을 찾는 이들은 절반 이상이 외국인 관광객이다. 일본인 친구들과 감천문화마을을 찾은 조동재씨가 감천문화마을 포토존에서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감천문화마을을 찾는 이들은 절반 이상이 외국인 관광객이다. 일본인 친구들과 감천문화마을을 찾은 조동재씨가 감천문화마을 포토존에서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첫 번째 정류장이자 우리나라 1호 공설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과 용궁구름다리가 놓인 암남공원을 지나면 감천문화마을에 도착한다. 한씨는 “‘부산의 마추픽추’라 불리는 감천문화마을은 오렌지 라인 12개 코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라고 소개했다. 버스는 감천사거리 정류소에 정차한다. 경사가 심하고 도로 폭은 좁아 대형 버스로는 운행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감천문화마을 입구까지는 마을버스로 갈아타거나 20~30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오르막과 계단이 이어져 걸어가는 게 만만치는 않다. 여기저기 뒤엉킨 전깃줄, 빛바랜 간판이 서울의 해방촌을 닮았다.

 

◇관광 명소 된 피란민들의 산동네

 

옥녀봉 산 중턱을 뒤덮은 듯 자리한 감천문화마을은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이룬 마을이다. 10여 년 전 ‘꿈꾸는 마추픽추’라는 이름의 도시재생사업으로 알록달록 새 옷을 갈아입고, 공공예술 작가들의 손길이 더해지며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페루의 마추픽추나 이탈리아 친퀘테레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지만, 아픈 역사가 만들어낸 마을은 세계 그 어느 곳과 비교 불가한 풍경으로 맞이한다. 한두 명이 지나갈 만한 산동네 좁은 골목마다 이야기가 가득하다. “8평이 넘지 않는 집들은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고, 골목을 막지 않게 다랑이논처럼 지은 것이 특징”이라는 게 한씨의 말이다. ‘별 보러 가는 148계단’ 얘기도 재미있다. 높은 곳에 올라 별이 보이는 게 아니라 ‘계단을 오르다보면 별이 보일 정도로 힘들다’는 뜻이란다. 감천문화마을 제2안내소 옆 ‘어린 왕자와 사막 여우’ 조형물은 이 구역 최고의 포토존으로 꼽힌다. 조형물 너머로는 마을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정국과 지민의 벽화 앞에도 기념사진 촬영 줄이 길게 이어진다.

 

 

감천문화마을의 인기 포토존인 '어린왕자와 여우' 조형물. 조형물 너머 산 중턱 다랑이논처럼 계단식으로 지어진 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않고, 골목을 막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 듯 지키며 지은 집들이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감천문화마을의 인기 포토존인 '어린왕자와 여우' 조형물. 조형물 너머 산 중턱 다랑이논처럼 계단식으로 지어진 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않고, 골목을 막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 듯 지키며 지은 집들이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비석 위 집'들이 모여있는 '아미비석문화마을'의 '피란생활박물관'은 피란민들이 살던 집을 당시처럼 재현해 전시관으로 꾸며놓았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비석 위 집'들이 모여있는 '아미비석문화마을'의 '피란생활박물관'은 피란민들이 살던 집을 당시처럼 재현해 전시관으로 꾸며놓았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감천문화마을에서 탐방을 끝내기가 쉽지만, 감천문화마을 입구에서 ‘까치 고개’라 불리는 고개만 넘으면 ‘1023 피란 수도 흔적길’이 있는 아미동비석문화마을(아미동 비석 피란 주거지)이다. 아미동 산19번지 일대는 구한말 형성된 일본인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던 마을이다. 6·25 피란민들과 부산시내 판잣집 철거 정책 등으로 떠밀려온 사람들이 묘지의 비석을 주춧돌 등으로 삼아 집을 지었다 해서 ‘비석마을’이라 불린다. 앞뒤 가릴 것도 없던 시절에 오직 살기 위해 비석을 받쳐 지은 집들은 피란 수도 부산의 유산이 됐다.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는 손정미 문화관광해설사는 “어떤 이는 ‘공동묘지에 지은 집’이라 쉽게 말하기도 하고 괴담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이곳 동네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무섭다는 생각을 어데 하노? 그 시절엔 사람에 떠밀려 등 눕힐 수 있는 땅 한 평 없는 게 제일 무서웠제~’라고 하더라”며 “‘우야든 같이 살아야 하니까 비좁아도 땡겨주고 또 땡겨주며 살았다’는 어르신들 증언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 갤러리'에선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며'라는 주제로 1960~90년대 시대의 초상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한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 갤러리'에선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며'라는 주제로 1960~90년대 시대의 초상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한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실제로 마을 계단이나 바닥, 집의 축대와 담장 등은 비석을 품고 있다. 억척스러웠던 당시 피란민들의 생활사는 골목 안쪽 두세 평 남짓 좁은 쪽방 등을 고쳐 피란 후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피란생활박물관’에서 엿볼 수 있다. 그 시절 가상의 인물인 ‘석이’ ‘미아’의 방을 비롯해 구멍가게, 봉제 공장 등으로 꾸민 박물관을 관람하고 골목을 빠져나오면 ‘아미비석문화마을안내센터’가 나온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였던 고(故) 최민식 선생의 작품을 전시한 ‘최민식 갤러리’도 꼭 들러볼 일이다.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며’라는 주제로 1960~90년대 흑백 사진들이 기다린다. 헐벗은 차림으로 엄마 젖을 빨고 있는 아이, 동생을 둘러업은 소녀, 외팔로 신문을 파는 청년 등 그 시절의 초상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1023일 피란 수도’ 흔적 따라가기

 

피란 수도 흔적길은 위쪽으로 ‘천마산 산복마을 흔적길’, 아래쪽으로는 ‘임시수도 탐방길’과 연결된다. 여유가 있다면 천천히 걸어가 볼 만한 거리지만, 이왕 시티투어 티켓을 끊었으니 시간 맞춰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승하차 지점인 감천사거리 정류장으로 간다.

 

 

피란수도의 대통령 관저(경무대) 등은 '임시수도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피란수도의 대통령 관저(경무대) 등은 '임시수도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부산 시민들의 '솔(soul) 푸드'인 밀면의 탄생 이야기, 국제시장의 옛 풍경, 피란민들의 판잣집 등을 자료로 살펴볼 수 있는 임시수도기념관의 전시관.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부산 시민들의 '솔(soul) 푸드'인 밀면의 탄생 이야기, 국제시장의 옛 풍경, 피란민들의 판잣집 등을 자료로 살펴볼 수 있는 임시수도기념관의 전시관.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피란 수도 부산 이야기는 부민동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석당박물관은 1959년 11월에 개관한 부산 최초의 박물관이다. 국보로 지정된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동궐도’, 몰운대와 태종대 등을 그린 보물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 등 유물 2만3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유물뿐 아니라 1925년 경남도청으로 지어진 박물관 건물은 임시 수도 정부청사(임시 중앙청)로 활용됐다. 한쪽엔 복원 공사를 하며 나온 주요 건축 잔해들도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해두었다. 석당박물관을 나서면 지난 2월 서구청에서 새로 조성해놓은 ‘1023 피란 수도 세계유산 탐방길(임시 수도 탐방길)’이 기다린다. 임시 수도 당시 대통령 관저로 쓰인 임시 수도기념관(경무대) 가는 길 사거리 길목엔 전차가 볼거리다. 골목길 안쪽엔 참전국 기념비, 벽화 등이 피란 수도 당시를 알린다. 부산의 원도심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치는 계단길을 따라 올라가면 빨간 벽돌의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가 나온다. 뒤편 전시관에선 피란민들의 판잣집부터 국제시장, 천막 학교 등을 드라마 세트장처럼 재현해놓았다. 피란민의 손에서 탄생해 부산 대표 음식이 된 밀면 이야기까지 부산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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