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 정신 <신정재이야기 6>
2023.05.14 21:47
기사도 정신
1968년인지 그 다음해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해 겨울에도 금년같이 눈이 많이 왔었다. 송년회 겸 서울사대부고 십일회 총회를 마치고 세종로에서 택시를 잡았다. 이은희(당시 동창회 여자 총무)의 집은 모래내(북가좌동)였고 나는 경희대 앞에 회기동이었다. 눈이 와서 버스는 물론 택시 잡기도 어려운지라 여자가 어떻게 혼자 귀가할 수 있나 생각하면서 택시를 같이 타고 신촌 쪽으로 달렸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교통 수단의 혼란이 오면 택시는 당연히 합승을 하게 되는데 어쩔 수 없이 어떤 취객과 합승을 하게 되었다. 운전기사가 "이 손님들은 모래내로 가시는 분들이니 손님은 신촌 근처에서 내려 바꿔 타셔야 되겠습니다."하고 합승한 취객에게 말하니까 그 취객 왈 "당신들이 내리슈!" 하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떠드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었지만 참고 달래는데 막무가내이다. 하는 수 없이 운전사와 같이 차를 세우고 끌어 내리려니까 나의 멱살을 잡고 택시 안으로 잡 아끄는 바람에 끌려 들어가면서 취객의 안면을 내 머리로 받는 꼴이 되었다. 코피가 터지고 실랑이를 하다 보니 30여분이 흘렀다. 억지로 끌어내고 나서 "운전을 하다 보면 별 미친놈도 다 보게 된다"며 투덜대는 운전사의 마음을 달래며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달려서 모래내 이은희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훨씬 넘었다. 기사도 정신으로 여자 동창을 집에까지 호송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집에까지 가려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나오는데 "참 고맙습니다. 집에까지 데려다 주어서"라고 이은희 어머니가 인사를 하였다. 내가 여자친구였다면 당연히 자고 가라고 했겠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잘 가라고 했겠지만 빈말이라도 자고 가라고 했으면 하고 섭섭해 했다. 하기야 그때 이은희 남편(이영근 장로)은 미국에 가 있었고 어머니와 사는데 외간 남자가 와 자고 갔다면 나중에 사위가 알면 얼마나 어색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섭섭했다. 자고 가라고 해도 잘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다시 나와서 홍릉! 청량리!를 부르며 합승을 해서 청량리에 왔을 때는 12시가 훨씬 넘었다. 그때는 통행금지 시간이 밤 12시였지만 그 날만은 해제가 되었다. 청량리역 앞에서 홍릉을 거쳐 경희대 앞까지 눈길을 혼자 걸었다. 술은 이미 다 깨어 정신은 맑았다. "참 기사도 정신을 지키기 힘드네! 괜히 객기 부리다가 이게 무슨 고생이람!"하며 혼자 투덜댔다. 나중에 내가 LA에 갔을 때 이은희 부군을 만난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였다. "이 장로님이 안계실 때 나는 이렇게 이은희를 보호해 주었으니 대포 한 잔은 그만두고 (장로님이니까) 저녁이나 사 주시지 요." 그는 기꺼이 저녁을 냈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 기사도 정신 값을 10년 후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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