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참수작전
2019.12.24 18:12
[만물상] 참수 작전 2차대전 때 독일 히틀러는 연합국 세 거두(巨頭)를 한꺼번에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소련 스탈린이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 참석한다는첩보를 입수하면서 그랬다. 작전명은 영어로 '롱 점프'. 독일 특공팀은 낙하산을타고 테헤란에 잠입해 거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중 스파이였던 보급품전달책이 영국에 계획을 흘리면서 특공팀은 작전 개시도 못 하고 사살당했다. 의미처럼적의 핵심 수뇌부를 제거하는 작전을 말한다. 사살뿐 아니라 생포·축출 등이모두 포함된다. 적 명령 체계를 와해시켜 단숨에 승기를 잡을 수도 있고, 알바그다디를사살한 '제로니모' '케일라뮬러' 작전은 참수 작전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특수 부대를 투입하는 전통적 방식 외에 최근에는 드론 폭격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공개했다고 한다.북이 최근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며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움직임을보이자 미국이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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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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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2019.12.2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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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호
2019.12.25 18:21
요즘 부쩍 자주 가공할 만한 영상물로 김정은의 잠자리는 편치 않게 하고 있는 건 분명한데
김정은의 핵에 대한 야욕은 여전히 꺽지를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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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2019.12.25 20:57
'참수작전' 좀 잔인한 말인 것 같은데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들립니다. 심지어 참수작전은 언제하나 하고
기다려지기도 하구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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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섭
2020.01.31 20:06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2020 신년특집]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1] 이광수, 김일성 그리고 이병철
金 "어릴 때 옆 동네 살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 놀라"
白 "김일성 평양 환영회 갔는데 군중들이 말도 안된다며 비웃어"
金 "친일파라는 춘원 없인 독립 못했을 것… 그 덕에 민족의식 키워"
白 "당시 최선 다해 실력 키우려 노력, 일본서 배울 건 배워야 했다"
金 "한국만큼 교육에 열정 쏟은 나라 없어… 그게 발전 거름 됐다
이병철, 사람 키우면 삼성 떠나도 한국에 남을 거니 괜찮다고 해"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의 영웅이다. 다부동 전투를 비롯해 주요한
전투에서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둔 우리 현대사 최고의 명장(名將)이다.
33세 때 한국군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미군은 지금도 백 장군에게
경의를 표한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김태길·안병욱 교수와 함께
국내 1세대 철학자 삼총사로 불렸다. 1954~85년 연세대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이후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1920년생이다.
지난 100년 동안 한민족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지켜봤다.
본지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한 세기를 돌아보고,
향후 100년에 대한 지혜를 얻고자 특별기획 '문무(文武) 100년의
대화'를 마련했다.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429호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성큼 사무실로 들어서자
빨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백선엽 장군이 소파에 앉은
채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백 장군은 다리가 불편해 서 있기가
어려운 상태다. 이동할 땐 휠체어를 사용한다. "어서 오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백 장군님도 건강하시지요?" 100세를 맞는
두 사람의 대화는 소박한 소재로 시작됐다. "백 장군님, 저와 나이가
같은데 몇 월생이세요?"(김 교수) "제가 11월 23일생입니다."(백 장군)
"그러세요? 저는 4월 23일입니다."(김 교수) "그러면 제 형님이시네요,
형님."(백 장군) "아, 그런가요. 하하하."(김 교수)
◇고향, 김성주 그리고 김일성
두 사람은 중학교 졸업 때까지 주로 평양과 그 인근에 살았다.
백 장군은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평양으로
이사했다. 김 교수는 지금의 만경대에서 1㎞ 떨어진 송산리에서 자랐다.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앞)과 국내 철학계 1세대 학자인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를 위해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올해만100세가 된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11일 서울 중구 성공회 성당에서
김 교수가 백 장군 휠체어를 밀고 있는 모습. /오종찬 기자
김―백 장군 태어나신 마을의 강서약수터가 아주 유명했다.
우리 집에서 40리 정도였는데 걷기도 하고, 때론 자전거를 타고
물을 뜨러 자주 다녔다.
백―저도 몇 번 그 약수터에 가본 적 있다. 우린 참 인연이 많다.
두 사람은 "몇 해 전 김동길 교수가 만든 '장수클럽'에서 처음 만난 이후,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하지만 어쩌면 어렸을 때 약수터에서,
혹은 평양 길거리에서 여러 차례 스쳤을 수도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학교 졸업 후 김 교수는 평양에서 숭실중·제3공립중,
백 장군은 평양사범을 다녔다.
―여덟 살 위 김일성이 옆 동네 산 셈이다.
김―해방 직후, 이웃 동네 김씨네 할아버지가 손자 김성주가 만주에서
돌아왔다고 인근 어르신들을 초대했다. 20여명이 갔는데,
대학 나온 사람이 저뿐이라며 같이 가자고 해서 갔다.
김성주는 창덕소학교 선배지만 그때 처음 봤다. 그 자리에서 김성주는
친일파 숙청, 모든 국토 국유화, 지주·자본가 숙청 등 여섯 가지를
얘기했다. '이 사람 공산주의자구나' 생각했다. 얼마 후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열렸다. 그곳에 다녀온 동네 어른들이
'김일성 장군이 성주야, 성주' 그러더라.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김일성 장군이 너무 젊어 보여 가까이 가보니, 아, 우리 앞 동네
성주더라고' 했다.
백―저도 그 환영회에 갔다. 소련군 장성이 단상의 청년을 가리키며
'항일 전투의 영웅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다. 군중이 웃으며 말도
안 된다고 수군거리던 장면이 선명하다. 해방 직후 고당 조만식 선생
비서로 일할 때도 두세 번 사무실에 찾아온 그를 봤다.
다소 거만하게 보이는 미소를 띠며 말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일성(왼쪽)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서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5년 후, 백 장군과 김일성은 6·25전쟁 때 한민족의 운명을 놓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펼치게 된다.
김―김일성이 태어났을 때 우리 아버지의 외숙모가 3개월 동안 젖을 먹여
키웠다. 그 할머니와 김일성 어머니는 같은 강씨였고, 같은 마을 출신이다.
비슷한 시기에 친정에서 출산했고, 김일성 어머니가 젖이 안 나와 그 친척
할머니가 대신 젖을 물려줬다. 나중에 그 할머니의 아들 3명 중 2명이
북한 공산당에 죽었다. 그 할머니는 "그놈(김일성) 젖 먹일 때 코를 콱 막아
죽였어야 했다"며 원통해했다.
◇누가 그들을 親日이라 말하는가
―어렸을 때 꿈이 뭐였나.
백―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평양으로 이사한 뒤 1년
정도 지났을까. 홀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대동강에 빠져
죽으러 갔다. 밥 한 끼 먹기 힘든 때였다. 다섯 살 위 누이가 어머니께
"나무도 뿌리를 내리려면 3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린 평양 온 지 1년밖에 안 됐다. 한 번만 더 참고 살아보자"고 했다.
김―꿈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으니까.
소학교 졸업식 날 어머니는 고무신이 없어 옆집에서 빌려 신고 갔다.
닳을까 봐 허리에 끼고 학교 근처에 가서야 신었다.
―한일강제합병 10년 후에 태어났다. 한민족이란 의식은 있었나.
백―우리 말을 쓰고 우리 전통문화가 있는 한 한민족의 정체성은
사라질 수 없다. 평양사범 다닐 때는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 사이에
싸움도 종종 있었다.
김―오늘날 대한민국 성공을 탄생시킨 출발점은 3·1운동이다.
생활과 사고의 단위가 국가와 민족으로 올라갔다. 근대적 의미에서
나라와 민족이 있어야 나와 내 가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식이 크게
싹텄다. 온 백성이 배워야 산다고 깨달았다. 각 지역 교회마다
학교가 생겼다.
―당시 춘원 이광수, 인촌 김성수 선생 등에 대한 평가는.
김―춘원과 인촌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우린 독립을 못 했을 거다.
고(故) 안병욱 교수는 "이광수 소설 '유정'을 읽고 민족의식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시대 사람들 중 95%는 춘원 등 때문에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그분들 때문에 친일한 사람은 없을 거다.
좌파 정권 때 친일파 딱지 붙이기 바람이 부는데 전적으로 정치적인
동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이 어떻게 그분들을 친일이라고 재단하는가.
백―일제 치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실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배울 게 있으면 배워야 했다. 언젠간 독립이 오겠지
생각은 했지만 그게 곧 올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때였다.
실력이 중요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김―그땐 무조건 일본 사람보다 앞서면 최고였고, 자랑이었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했을 때 정말 대단했다. 안익태와 최승희는
음악과 무용 쪽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김 교수는 중학교 3학년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다.
만주에서 유학 왔던 동급생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가겠다"고 학교를
떠났다. 김 교수는 학교를 떠나 있던 1년 동안 평양부립도서관에서
철학과 문학, 소설을 읽었고 이때 독서가 바탕이 돼 철학과 교수가 됐다.
백 장군은 어릴 때부터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본한테 더
배우고 익혀 강해지겠다며 평양사범 졸업 후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다.
◇교육, 우리 민족의 가장 강력한 저력
김―전 세계 어딜 다녀봐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만큼 교육에 열정을
쏟은 민족, 국가는 없다. 그게 독립의 씨앗이 됐고, 국가 발전의 거름이
됐다. 6·25전쟁 직후 사람들이 "우리도 필리핀만큼만 잘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린 필리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산다. 우리가 한창 성장할 때 삼성 이병철씨를 만났다.
신입 사원 교육에 너무 많이 투자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사람을 키우면 삼성 떠나도 한국에 남으니까 괜찮습니다"라고 하더라.
백―초등학교 때부터 평양부립도서관에 자주 가서 책과 신문을 읽었다.
도서관 정문 오른쪽 열람실에는 항상 신문들이 있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와 일본 신문들도 있었다. 신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조선의 냉혹한 현실이 어떤지 알려주는 창이자 등불, 스승이었다.
김―전 세계 문화권을 만든 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인데
공통점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100년 이상 책을 읽은 나라라는 점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영국보다 먼저 발전했지만 독서를 안 해서 처졌다.
[김형석 교수의 질문]
日帝의 학교 폐교 협박에 신사참배장 맨 앞에 서서
눈물 쏟던 교장 선생님… 그는 친일파인가 아닌가
숭실중은 미국 선교사가 세웠다. 당시 일본 총독부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학교 문을 닫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때문에 미국 선교사인 교장이 떠났다.
평양의 기독교 유지들이 대책회의를 한 끝에 학생 500명이 다니는 학교를
문 닫게 할 수 없다며 장로 한 분을 교장으로 보냈다. 신사참배 문제로 1년간
학교를 그만뒀던 김 교수는 복학 이후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신사참배 날 교장이 제일 앞에 , 그 뒤로 교사와 학생들이 종렬로 섰다.
키가 제일 작아 학생 줄 제일 앞에 있었던 김 교수는 교장 선생님 얼굴을
똑똑히 봤다. 유난히 늙어 보이는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학생들이 뒤에 있어 손을 올려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김 교수는 깨달았다.
'이분이 우릴 대신해 십자가를 졌구나.' 김 교수는 묻는다.
"이 교장 선생님은 친일파인가, 아닌가."
총살 열흘 앞둔 박정희 "살려달라" 한마디… 백선엽 "그렇게 해봅시다"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2] 이승만과 6·25, 그리고 박정희
白 "이승만, 美사령관들 불평하면 美 헌법정신 거론하며 꾸짖어"
金 "6·25는 시련이었지만 대한민국이 국제화되는 계기로 작용"
白 "사회주의적 개혁? 자유민주주의를 이길수 있는 것은 없어"
金 "이탈리아 前공산당원이 충고하더라, 절대 북한 믿지말라고
1950년 8월 21일. 대구 북방 22㎞ 다부동 전선(戰線)이 급박해졌다.
천평동 협곡 좌측방 고지를 지키던 국군 1사단 11연대 1대대가 북한군
공세 소문에 후퇴하고 있었다. 고지가 적에게 넘어가면 협곡 아래 있던
미 27연대의 퇴로가 막히고, 다부동 전체 전선이 무너질 수도 있다.
백선엽 1사단장은 지프를 타고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산등성을 내려오는
장병 앞을 막아섰다. "우리가 더 물러설 곳은 없다. 내가 앞장선다.
내가 두려움에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백선엽은 권총을 뽑아
들고 적들이 넘어오는 고지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장병들이 뒤를 따랐고 고지를 재탈환했다. 군에서
'사단장의 돌격'이라 부르는 일화다.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사무실에서 김형석 교수와
'문무(文武) 100년의 대화'를 가진 백 장군은 당시 일을 회고하며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곳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다부동은 6·25전쟁 당시 최고 격전지였다. 서울~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핵심 축 선상에 있다. 백 장군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이곳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맹렬한 공세에 맞서 싸웠다. 매일 사상자가 700~ 800명 발생했다.
여기서 졌다면 대구·부산마저 점령당해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이후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뒤 대대적 북진에
나서게 된다. 김 교수는 이날 백 장군 손을 꼭 잡으며 "그때 잘 싸워주셔서,
나라를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이 되다
―일제 지배에 이어 6·25전쟁이란 큰 시련을 맞았지만 우리 민족은 이를
국가 부흥의 발판으로 삼았다.
백: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전 세계에 공산주의가 크게 퍼졌다.
동유럽과 중국, 동남아, 북한까지 진출했다. 6·25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급격히 팽창하던 공산주의 세력을 처음으로 저지했다는 의미가 있다.
김: 다부동 전투 때 난 부산으로 피란 갔는데, 모든 국민은 백 장군이
잘 싸워서 제발 우리나라를 지켜달라고 빌었다. 다부동이 무너지면
김일성이 부산까지 다 점령해 버리게 될 거라고들 얘기했다.
그곳은 대한민국의 생명선이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대령이었던 백 장군은 1950년 7월 준장을 단 이후
초고속 진급을 거듭해 1953년 1월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부산의 임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오른쪽 어깨에,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왼쪽 어깨에 별 넷 계급장을 달아줬다.
이 대통령은 "자넨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이야. 옛날엔 임금만이 대장이었지.
지금은 리퍼블릭(공화국)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429호 백선엽(오른쪽) 장군
사무실을 방문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백 장군이 군 복무 시절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백: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희생됐고,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됐지만 얻은 것도
있다. 북한과 공산당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됐고, 우리나라가 미국 주도의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본격 합류하게 됐으며,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 살아남아야
한다는 민족적 의지를 더욱 다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역설적이지만 6·25전쟁은 대한민국이 국제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군과 유엔군이 들어오면서 자유민주주의화가 급속하게 진행됐고,
일본과 가까워지면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전쟁이 계기가 돼 우리가 이렇게까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최근 들어 국내에 북한 공산 세력을 너무 모르고, 심지어
친북·종북 성향의 세력이 발호하는 분위기가 있어 대단히 걱정스럽다"고 했다.
김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처칠 총리는 '아직 공산주의와 3차
대전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자라고 했다"며
"그런 방심 결과,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터졌다"고 말했다.
김: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당시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한 전직
공산당원을 만났다. 그는 18년 동안 공산당에 몸담다 전년도에 탈당했다며
'한국은 절대로 북한을 믿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엔 민주주의도,
휴머니즘도 없다. 얼마든지 거짓말을 한다. 자신들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 말을 문재인 대통령이
들었으면 좋겠다.
◇두 巨人, 그들의 리더십과 그림자
―지난 100년 우리 민족,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공을
만들었다. 누구 얼굴이 떠오르나.
김: 단연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개인으로
이름을 남길 사람은 그 두 사람뿐이다. 이승만은 독립과 건국,
전쟁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자유와 민주 세계로 이끌었다.
미국과 강력한 동맹 관계도 구축했다. 자유민주 진영 쪽으로 가지
않았다면 지금 우린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처럼 됐을 수도 있다.
박정희는 우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줬고, 이후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백: 세계 흐름을 꿰뚫고 있었던 이승만은 높은 학식, 강한 의지력,
굳건한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6·25 때 미군이 우리 국군의
전투 능력에 불만을 표시할 때면 미국 헌법 정신을 거론하며 강하게
꾸짖기도 했다. 민주·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미국 건국 정신을
들며 약소국 한국의 사정을 이해 못 하냐고 했다.
그럴 때마다 워커·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 도쿄에 있던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등이 진땀을 뺐다. 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이승만은
말년에 군부대 시찰 때 야산의 묘를 가리키며 "저곳은 어느 집안
묘역인가"라고 묻고는 "집안이 잘 이어지는군" 하며 씁쓸히 말하곤 했다.
백 장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맺은 특별한 인연도 털어놨다. 해방 이후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정보국장(대령)을 맡고 있던 백 장군은 군에
침투한 좌익·공산 세력을 뿌리 뽑는 숙군(肅軍) 작업을 총지휘했다.
이때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하다 잡혀 열흘 정도 뒤 수색에서 총살형을
앞두고 있던 박정희를 풀어줬다. 1917년생인 박정희는 백 장군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군 합류가 늦어 당시 소령이었다.
<대장에 진급한 백선엽(맨 왼쪽) 장군이 경무대에서 이승만(맨 오른쪽)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누는 모습.>
―특별한 인연이 있어 석방했나.
백: 아니다. 박 소령은 그저 자신을 한번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짧은 경상도 사투리였는데 뭔가 진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렇게 해봅시다" 했다. 사실 당시 숙군 과정에서 실제 처벌받은
사람은 일부였고, 연행자(4749명)의 90%는 군문을 떠나게 하는
차원에서 마무리했다.
김: 박정희의 성공에는 뛰어난 용병술도 크게 작용했다. 정주영·박태준 등
인재들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백: 박정희는 나중에 대통령이 된 뒤에도 나를 '형' 또는 '백형'이라고 불렀다.
―1980년대 이후에도 기적적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성취가 이어졌다
김: 이승만·박정희 두 사람이 뿌린 씨앗 덕분이다. 이후엔 대통령 개인의
역할이란 의미는 별로 없다. 예를 들어 전두환이 집권했을 때 박정희가
키운 경제를 망가뜨리면 어떡하나, 교육을 망칠 거야 하고 걱정했다.
그런데 대통령 되더니 난 경제 몰라, 교육도 몰라 하면서 모두
전문가에게 맡겼다. 그게 경제와 교육을 살렸다. 민주화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세력이라는 큰 흐름이 만들어졌기에 가능했다.
―국내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백: 공산·사회주의는 유럽에서든, 아시아에서든 자유민주주의를
이길 수 없다. 해방 후 공산주의 좌익 세력은 모든 자산을 모든
사람이 함께 소유하자고 하더라. 불가능한 꿈이다. 공산주의를 내세웠던
그 어떤 나라도 그런 이상적 사회를 현실에서 구현한 적이 없다.
김: 일제 때 경성제대 3대 천재는 유진오, 이강국, 내 친구 박치원의 형인
박치우다. 치우 형은 안국동에서 현대일보를 만들어 가장 늦게까지 좌파
운동을 했다. 6·25전쟁 나자 치우 형제는 모두 북한으로 갔는데 이후 종적이
사라졌다. 남한에 있던 좌파 인사들은 북한 가서 다 숙청당했고, 우리 같은
북한 출신들은 남으로 내려왔는데 대한민국이 받아줬다.
남한에 있던 사람과 월남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빠르고 크게
성장시켰다. 안병욱 선생과 만나면 늘 이런 얘기를 했다.
[내 인생의 가장 빛난 날은…]
白 "신나게 평양 입성 1950년 10월 19일"
金 "인생의 열매 나눠주던 60~75세"
―인생 최고 전성기는 언제인가.
백: 1950년 10월 19일이다. 1사단장으로 국군과 일부 미군 장병 등
1만5000명을 이끌고 북한 수도 평양에 첫발을 들여놨다.
우린 6·25전쟁이 터진 후 다부동에서 김일성의 공세를 막아낸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고 북진에 나섰다. 그때 정말 신났다.
공산당을 물리치고 곧 통일이 될 것 같았다. 낮엔 패튼 장군처럼 1호
전차에 올라 진격했고, 밤엔 내려 장병들과 함께 걸었다.
내가 "평양"이라고 외치면 장병들은 "진격"이라고 외쳤다. 평양 입성만은
미군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다. 결국 미군보다 15분 앞서 평양에 '1착'했다.
(평소 잘 웃지 않는 백 장군은 이때 입가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김: 내 경우는 60~75세였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인생은 3단계인 것
같다. 처음 30세까지 1단계는 배우는 시기, 60세까지 2단계는 일하는 시기,
그리고 3단계는 제2의 인생을 사는 시기다. 회갑 되고 정년을 맞았는데
강의도 더 잘할 것 같고 학문에 대한 의욕도 더 많아졌다.
이때는 나무로 보면 열매를 맺어 나눠 주는 단계다.
사회를 위해 살게 되더라. 철이 들고 사람으로서 성장한다. 기억력은
떨어지는데 사고력이 커진다.
종교 탄압하던 김일성, 뒤에선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아멘"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3·끝] 아이젠하워, 정일권,
한미상호방위조약
白 "김일성, 만주군관학교 출신 포섭하려 정일권 등에 접근"
金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 맡아 운영하던 중 北압박에 월남"
白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만나 한미방위조약 필요성 설득"
金 "미국보다 중국에 기우는 文정부, 어리석었다는 평가받을 것"
숭실대학(지금의 숭실대학교) 7대 학장을 지낸 고(故) 김성락 목사는
생전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자신의 방북 스토리를 들려주곤 했다.
김 목사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평양 숭실중 동문이었고,
함께 교회를 다닌 주일학교 친구였다. 이런 인연으로 김 목사는 1980년대
초반 두 차례 김일성의 초청을 받았다.
"한번은 김일성이 함경도에 있는 별장으로 김 목사님을 모셨데요.
점심 시간이 되자 김일성이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니,
기도가 끝나자 '아멘' 하더래요. 목사님은 헤어질 때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고 왔다고 하데요."
지난해 11월 중순 본지 신년 특별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를 위해
<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만난 백선엽(왼쪽) 장군과 김형석 교수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해방 직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 땅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고,
기독교 등 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던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고, 자신 또한 기독교 신자였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이름 반석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김 교수는 "자기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종교를 가진 주민들은 잔인하게
억압하는 김일성의 모습은 북한 체제가 얼마나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모순 덩어리인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말했다. 본지 특별기획 '文武,100년의 대화'의 두 주인공 백선엽 장군과 김형석교수는 1920년생
동갑내기로 해방 이후 김일성 정권이 북한을 장악하면서
남한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북한에 계속 남았더라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장군은 1945년 12월 말,
김 교수는 1947년 여름에 월남했다.
―20대 젊은 나이였다. 남한으로 오겠다는 생각을 왜 하게 됐나.
김―그곳에선 살 수가 없었다. 일제 때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를 해방 후
내가 이어받았다. 북한 공산당 정권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학교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다. 학교 재정을 책임졌던 아버지 친구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공산당 간부였던 제자 중 한 명이 밤중에 찾아와 "선생님 학교가 사상이
제일 안 좋다고 찍혔다"며 빨리 피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고향을
등지게 됐다.
백―초기에 김일성은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포섭하려 했다. 정일권·김백일
등에게 접근해 "함께 나라를 건설하자"고 했다. 만주군관학교 4년 선배인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상의했다.
그때 "김일성은 처음에 우릴 이용한 뒤, 결국은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1945년 12월 중순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고, 우린 서둘러
북한을 빠져나와야 했다.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가.
김―이번 세기에 벌어질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공산주의의 멸종일
것이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들은 전 세계를 점령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역사에선 그 반대로 공산주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중국 공산당도 북한 정권도 그 운명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백―향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국가들은 살아남겠지만,
공산주의는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또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정치
지도자가 있는 국가는 살아남고, 사리사욕에 눈먼 지도자를 선택한
국가는 도태될 것이다.
백 장군은 한·미 동맹의 상징적 인물이다. 6·25 전쟁 때 미군과 함께
북한군·중공군과 맞서 싸웠고 전쟁 후에는 미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국군 전력증강·현대화 작업을 벌였다. 미군은 지금도 백 장군을
"우리 모두의 영웅"이라고 부른다. 1953년 5월 미국 방문 당시 6·25
전쟁 때 전우 알레이 버크 제독의 조언을 받아 일정에 없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면담을 성사시킨 뒤,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나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고,
한·미는 1954년 역사적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백―미국은 6·25 전쟁 때 함께 피를 흘린 너무나 소중한 동맹이다.
우리는 미국과 동맹을 "포에버(forever), 포에버, 포에버" 갖고 가야 한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만이 우리의 소중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함께 지킬 수 있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김―뉴질랜드에선 유능한 사람은 호주로 간다. 호주에선 유능한 사람이
캐나다나 영국으로 가고, 캐나다에선 또 미국으로 간다.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많은 사회는 편하게 살 수는 있지만 국가 발전이란 면에선
자유민주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경쟁이 심한 시기에는 선의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데, 이때는 자유민주주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과 독일 등 글로벌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백―지금의 상황이 6·25 전쟁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정말 걱정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여전히 공산·사회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북한은 여전히 남한을 적화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우린 개방적인 해양의 문명권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1952년 12월 4일 경기도 광릉 수도사단에서 아이젠하워(앞줄 왼쪽에서 둘째)
당시 미 대통령 당선자가 망원경으로 기갑부대 기동, 포 사격 훈련을 참관하는
모습. 앞줄 왼쪽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백선엽 장군은 오른쪽 끝에 서 있다.>
―문제는 일본과의 관계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지배를 받은 나라 중
우리나라가 일본과 가장 관계가 나쁘다.
김―식민지 역사가 길어서 그렇다. 더욱 큰 문제는 국가 지도자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를 악용하려는 데 있다. 한·일 문제를 풀려면 우선 사람들의
교류가 많아야 하고, 그다음에 문화 교류와 경제 교류가 튼튼하고 활발해져야
한다. 정치는 그다음이다. 맨 마지막이 돼야 한다.
백―1958년 참모총장 재직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일본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한일정상회담 배석을 위해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이 대통령께 물었다.
언제쯤 일본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것 같으냐고. 이 대통령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데 40년이 걸렸다. 우리가 36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니 적어도
40년은 걸려야 할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일본과 관계가 험악하다.
―최근 국제 정세를 보면 중국이 우리 민족 앞날에 엄청난 먹구름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백―중국은 아주 오랫동안 한반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패권국가였다.
그 역사와 문화적 바탕에는 중화주의(中華主義)가 뿌리 깊다.
여기에 공산당 일당 독재가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다. 개혁과 개방으로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경계가 필요한 나라이다.
김―앞으로 50~60년 동안은 우리를 비롯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중국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할 것이다. 특히 우린 남북문제, 경제문제,
미국과의 외교 문제 등에서 중국의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중국이 공산당 독재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될 때 비로소 달라질 수 있다. 그때까지 중국과 경제 협력은
하되, 정치·외교적으로는 거리를 둬야 한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미국보다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수십 년 지나서 보면 그렇게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숙제인 통일이 이번 세기 중에 이뤄질 수 있을까.
김―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점은 북한 정권을 그대로 두고는 통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 체제·사회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거나 현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 문제는 지금 정권을 그대로 둔 채 북한 체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강력한 고립 정책을 펴야 한다. 후진국 독재 국가는 군 때문에 유지된다.
군인이 배곯는 상황이 되면 독재 정권은 끝장이 난다.
백―통일까지 가는 길엔 수많은 난관과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해가 나든, 아무리 상황이
유리하거나 불리해도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게 있다면 그건 무력,
즉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키는 그 어떤 유혹과 자만,
꼬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유한 나라와 강한 국방력,
즉 부국강병(富國强兵)은 나라를 지키는 토대이자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뉴 밀레니엄 시대 젊은이들에게…]
金 "국가·민족 넘어 세계시민으로 성장하라"
白 "사람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려 노력해야"
―올해 태어나는 2020년생과 꼭 100살 차이가 난다. 21세기를 이끌어갈
주역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김―100년 전 3·1운동을 계기로 가족 수준에 머물던 공동체 의식이
민족과 국가 수준으로 올라갔다. 우린 국가와 민족이 가족보다 먼저이고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퍼지는 시대에 태어나 자란 세대이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우리 젊은이들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시민으로 성장해야 한다. 폐쇄적인 민족 지상주의와 국가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고전을 많이 읽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신적 성숙함 없이 국가는
자랄 수 없다. 다음으로는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반드시
가져보라는 것이다. 대학까지는 국내에서 나오더라도 대학원은 외국에서
다니라고 권하고 싶다.
백―내가 군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 작전, 전략과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주요한 전투에서 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휴머니즘, 즉 사람에 대해 좀 더 진솔하고 깊게 이해하려고 했 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평양사범에 다니는 5년 동안 독서를 많이 했다.
책도 많이 읽었고, 신문도 엄청 읽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일까에
대해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어느 순간 세계를 보는 눈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자각의 순간을 우리 후손들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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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작성자 복돌이 -
엄창섭
2020.02.07 21:41
-
엄창섭
2020.02.16 20:58
• 추천영상 이전추천영상 다음 "봉준호 감독은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것 같다."
"그는 놀라운 감독일 뿐만 아니라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다."
봉준호의 수상 소감이 담긴 유튜브 동영상 아래 달린 해외 관람객들의 댓글들이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다양한 영화상 시상식에서 봉 감독의 소감을 보고 있노라면
객석에서 빵빵 터지는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진정 그 자리가 시상식장인지
아니면 스탠딩 코미디 홀인지 의심될 정도다.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영화 철학까지
샤론 최의 통역으로 더욱 빛난 이야기 이게 가능했던 것은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 캠페인 기간 내내 그 옆에서 봉 감독의 말을 영어로 정확하게 옮겨준
샤론 최(최성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영화인들과 관람객들의 뜨거운 반응은
봉 감독과 샤론 최의 완벽한 하모니 덕분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 감독의 유머 감각, 그게 다가 아니었다. 봉 감독의 얘기는 그저 들떠서 해외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감사 치레가 아니다. 수상 소감이나 관객과의 대화에서
봉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배우들의 연기는 어떻게 끌어내는지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어릴 때 돋보기로
종이 태우던 얘기까지… 심지어 "해외 무대에서 이런 얘기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디테일하게' 들어가 영화 얘기를 들려주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지난해 9월 산타바바라영화제(SBIFF) 관객과의 대화도 그중
하나다. 그는 어릴 때 돋보기를 들고 종이를 태우던 기억까지 끌어내며 자신의
영화를 설명한다. "어릴 때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서 종이를 태우면 연기가 나면서
타잖아요. 작은 초점이 모이면서… 그때 종이가 탈 때의 쾌감 같은 집중력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 봉 감독이 이렇게 디테일하게 말하고 나면 바통은
바로 그의 통역을 맡은 샤론 최(최성재)에게 넘어간다. 샤론 최는 그의 이야기를
영어로 이렇게 옮겼다. "When we were little, we would use magnifying glasses
to burn very small dots onto the paper. And you would always see the smoke
coming from the paper from this tiny dot focus from the sunlight. I really
want to portrait that excitement and joy comes from that tiny dot burning."
봉 감독의 의중을 100% 파악한다는 것 샤론 최의 영어엔 어려운 단어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봉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얘기를 이렇게 완벽하게 잘 옮길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30년 경력의 통역사도 감탄하게 한다는 샤론 최의 힘이다.
유머도 빠뜨리지 않는다. 지난 1월 할리우드 비평가협회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은
봉 감독은 함께 각본을 쓴 한진원 작가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약간 변호사나 회계사의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변태적인 멋진 아이디어로 가득
찬 저의 공동작가 한진원 씨를 소개합니다.” 그냥 이름을 불러 소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작업한 작가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변태적인 멋진 아이디어"라 고 한껏
추켜세웠다. "And my great partner in writing is here. Today he looks like
lawyer or an accountant but he is always filled with very perverted great ideas."
1인치의 장벽, 비유까지 멋지게 가장 주목받은 소감 중 하나가 바로 '1인치의 장벽'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자막이 달린 외국 영화에 대해 관람객들의 거부감이 없지만,
세계 영화의 심장이라는 곳 할리우드에서는 영화팬들이 정작 자막 달린 외국 영화는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봉 감독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얘기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이 장벽은 이미 무너졌다"고 수정했지만 말이다."자막의 장벽을,
장벽도 아니죠.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 샤론 최는 이 발언도 아주 깔끔하게 영어로 옮겼다. "훨씬 더
많은 영화"라고 한 봉 감독의 말을 오히려 "so many more amazing films"라고 살짝
바꾼 그녀의 센스도 돋보였다. "Once you overcome the one-inch tall barriers of
subtitles, you will be introduced to so many more amazing films."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봉 감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화와
함께해온 자신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히치콕의 영화를 50번 이상 봤다"
고 하거나, 객석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한껏 드러내는 대목에서다.
단순히 자신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을 넘어서 선배 영화인들에게 존경심, 영화에 대한
경외심까지 진솔하게 드러냈다. 할리우드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인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영화가 보여지는 2시간 동안 관객을 2시간 동안
제압하고 싶어요. 히치콕이 그랬던 것처럼요." " I always want to overwhelm the
audience throughout the running time like Hitchcock did. (2020년 1월 4일
골든글로브 기자회견서) 그리고 지난 9일 시상식 장에서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
그가 어떻게 그 자리에 서 있게 돼 있는지 이해하게 하는데 핵심이 되는 얘기를
들려준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제가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어요.
영화 공부할 때…”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When I was young
and studying cinema, there was a saying that I carved into my heart which is…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봉준호 감독은 또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가 그냥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사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샤론 최의 절제돼 있으면서 정확한 통역을 통해
세계 영화인들에게 전해졌다. 이런 통역은 단순히 언어 재능을 넘어서 샤론 최가
무엇보다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기에 더욱 가능한 일이었다. •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봉준호 '완벽 빙의'···
외신 감탄 부른 샤론 최의 8가지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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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뉴스에서 참수작전이라 말이 자주 나왔었는데 이제 일목요연하게 이해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큰 계획은 많았어도 성공은 별루 없군요
최근의 미국이 알카에다 빈 라덴, IS 알 바그다디를 사살한 것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