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날에 <글 윤경자>
2024.02.21 21:09
정월 대보름날에 글 윤경자
설 쇠고 이맘때가 되면 20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 요즈음은 마트에 가면 수시로 갖가지 보름나물이 있어 아무 때나 편하게 구입할 수 있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는 철 따라 미리 준비하여 저장해야 했다.
엄마는 봄철부터 경동시장을 드나들며 나물거리를 준비하셨다. 오빠가 좋아했던 취나물과 고사리 도라지 고춧잎을 시작으로 여름철이면 윤기나는 애호박을 사다가 동글동글 썰어서 채반에 담아 말리셨고 늦여름이면 예쁜 보라색 가지를 길이로 길게 4~6 등분해서 빨랫줄에 나란히 걸쳐서 말리셨다.
김장철이면 무말랭이도 넉넉히 준비해서 말린 고춧잎을 넣고 갖은양념에 버무려 겨우내 밑반찬으로 요긴하게 먹었다. 시퍼렇고 굵은 무청은 한 중씩 짚으로 역어 바람 잘 통하는 그늘에 말려서 집 뒤꼍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아 두셨다. 마늘 엮은 것과 나란히 높은 담벼락에 걸려있던 뒤꼍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엄마는 해마다 설날이 지나면 이렇게 정성스레 장만하신 나물거리를 챙겨 주셨다. 나는 애쓰셨다는 말 한마디도 않은 채 받기만 했다. 어떤 때는 웬 종류가 이리 많으냐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참으로 염치없는 딸이었다. 요즘 쉽게 살 수 있는 마른 나물은 기계로 말린 것이라 그런지 허울은 멀쩡하고 깨끗해 보이지만 다듬고 나면 쇠서 질기거나 물컹거리고 잡풀이 섞여서 버려지는 것이 더 많다. 나는 나물 중에 시래기나물을 좋아한다. 바싹 말려진 시래기는 부서지지 않게 분무기를 뿌려서 촉촉해지면 미지근한 물에 충분히 불린 뒤 중불에 푹 삶아서 찬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다. 투명한 겉껍질을 살살 벗겨 버리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기름에 볶는데 중간에 여러 번 육수나 물을 보충하면 부드럽게 잘 무른다.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갖은양념으로 마무리하면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넉넉히 준비해서 냉동 보관해두고 토장국도 끓이고, 생선을 조릴 때나 샤부샤부의 재료로도 손색이 없다. 정월 보름날 오곡밥에도 아주 잘 어울리는 나물이다.
우리 삼 남매는 할머니표 나물 중에 가지나물을 좋아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내가 말려서 볶아 주었지만 맛이 없단다. 아무래도 외할머니의 손맛에 비해 정성이 부족한 탓인가 보다. 큰딸이 출가해서 미국 생활을 할 때 입덧을 하는데 보름나물이 먹고 싶단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어렸을 때 거실에 있던 연탄난롯가에 둘러앉아 커다란 양푼에 보름 쇠고 남은 나물을 듬뿍 넣고 밥을 비벼서 숟가락으로 각자의 몫에 경계선을 긋고는 재잘거리며 먹던 기억이 입맛을 자극했나 보다.
엄마는 젊은 나이에 혼자되신 후에 오빠와 나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서울 이모님 곁에 살면서 고생이 많으셨다. 아버지 몫까지 짊어지시고 오직 우리 남매만을 위한 고달픈 삶을 보내셨다. 험한 풍파를 겪으셨지만 매사에 반듯하고 엄격하셨으며 말 수가 적은 편이셨다. 내가 결혼하고 삼 남매를 키우면서 젊은 시절의 엄마가 평생을 희생하며 살아오신 세월을 조금 터득할 수 있었다. 무서웠던 6.25와 부산 피란생활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80을 바라보는 이 딸은 남편을 보내고 나서야 엄마의 고된 삶을 돌이켜보며 가슴을 치고 있다. 엄마의 지극한 사랑과 희생이 없었으면 오빠와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말 잘 듣고 착한 딸이었는지는 몰라도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따듯한 말도 못 한 무정한 딸이었다. 이제야 휘영청 보름달을 바라보며 가슴을 친들 무엇하리~~ 오빠와 내가 별 탈 없이 가정을 꾸려가고 있음에 만족하셨고, 노후에 “지점장 댁 할머니” 라는 동네 어른들의 호칭을 들으시며 환한 미소를 지으시던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오빠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신 것이 그나마 나의 큰 위안이 되었다.
며칠 전 장을 보다가 말린 시래기를 보는 순간 습관적으로 카트에 담았다. 집에 와서야 함께 먹을 사람도 없는데 이게 뭐야? 난 아직도 홀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거나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나눌 사람 없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척 힘들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밤새 내린 눈으로 한결 산뜻해진 우면산을 멀거니 혼자 보았고 이제 5월이 오면 꽃보다 아름다운 연록색의 산자락도 나 혼자 보겠지. 무더운 여름날엔 더위를 피해 예술의 전당 광장에 들러 시원한 음악분수 앞을 함께 산책했었는데,
금년에도 시래기가 있으니 나물을 볶아야겠다. 남편이 좋아했던 무나물과 도라지 시금치 가지나물이면 오색도 갖추게 되었고 가까이 살고 있는 아들네 식구들 오라 하면 되겠다. 고만고만한 어린 남매 키우느라 힘든 며느리도 좋아하겠지? 늦은 나이에 결혼한 아들은 부모의 마음을 아는 듯 첫딸 낳고 둘째 아들을 낳았다. "내가 앞으로 2~3년은 더 살 수 있겠지?" 남편이 갓 태어난 손자를 보고 와서 했던 말이다. 조상님 뵈면 장손으로서 임무를 다 했노라고 당당히 여쭙게 되었다며 무척 기뻐했다. 더 살고 싶은 희망이 생긴 것 같아 모두들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손자가 백일도 되기 전에 남편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외면한 채 홀연히 가 버렸다.
아들네 식구는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홀로된 할미를 보러 온다. 좁은 집에서 장난감 속에 파묻혀 살던 손주들은 넓은 할미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전쟁터로 만든다. 볼 때마다 쑥쑥 자라는 어린것들의 재롱을 보며 이 할미는 다리 허리가 아파서 안아 볼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고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 살 맛이 난다. 나 혼자 이렇게 호강을 하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남편과 함께라면 몇 곱절이었을 텐데...
아들은 올 때마다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아버지 영정 앞에 선다. 아들의 뒷모습이 그렇게 측은할 수가 없다. 아비 옆에 서있던 손녀는 두 손을 모으고 개구리처럼 방바닥에 엎드린다. 제 깐에는 어미 아비 따라 할아버지께 큰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나보다 눈물이 더 많고 마음이 여린 아들의 심정은 나와는 다른 아쉬움과 슬픔이 많은 것 같다. 바위같이 든든하고 비바람 막아주던 아버지의 빈자리가 얼마나 허전하겠는가?
어느새 나의 눈앞이 흐려진다. 얼른 화장실 문을 열고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에는 돌아가신 나의 엄마가 계셨다. " 이제 그만 좀 울어라."
근엄했던 거울 속의 엄마도 눈물에 어려 있다. " 알았어 엄마! 이젠 안 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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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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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은
2024.02.2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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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흥숙
2024.02.21 21:49
영은아, 오늘이 오곡밥을 먹는 날인가? 하고 놀라서 읽어내려갔어. 경자 글이네. 어쩌면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잘 표현했는지 애처럽기도 하네. 하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는 날이 많아졌지. 성경쓰기를 열심히 한다는 경자야, 혜남이 처럼 예쁜 글체가 나올 것 같다. 영은아, 고맙다. 잘 옮겨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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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자
2024.02.22 22:42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더니 정월대보름을 맞이하며
그리운 친정어머님, 오라버님과 손주들의 할아버님을
그리워하는 내 친구 경자의 진솔하고도 애틋한 글을 다시 접하니
왈칵 흘러간 세월을 부등켜 안고 함께 울고싶어 졌다.
키가 날씬하신 용모에 눈가에 다정한 웃음을 담고 반겨주시던
경자어머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옛시절을 되돌아보게 해서일거다.
손을 잡고 복도에서 걸어가면 "너희들은 꼭 자매같구나"라고들 하셨지!
섬섬옥수로 정성껏 써올린 우리 동창회보 표제는 섬세하고 자상한
경자의 원숙한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있어 늘 감탄하며 존경한다.
우리 소녀시절을 함께 자라고 어른들이 되어 가면서 지켜주고 보살핀
우리들의 인연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는것도 이제 웬만큼 하고도 넘게
나이를 먹은 때문일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들의 연줄은 끌고 당기며 이어져 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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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자
2024.02.23 13:22
평소 기라성같은 동문들의 수필집을 열심히 읽다보니
삼년된 서당개처럼 어느새 풍월을 읊게된게 아닌가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고보니 민망한 마음 가득하지만 한편으론 춤추는 고래가 된 기분입니다.
김영은 ㆍ이태영 동문님 생각지도 못한 기쁨을 주시어 고맙고 감사합니다. -
김동연
2024.02.23 21:06
전에도 읽은 것 같은데 다시 읽어도 새롭고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는 글이구나.
잊고 있던 엄마 생각도 나고 가슴이 뭉클해 오네. 좋은 글 찾아 적시에 올려 준 영은이 고마워.
경자는 글솜씨도 좋고 문장력도 좋아서 부럽구나. 훌륭한 솜씨 아껴두기에 아깝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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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
2024.02.23 22:14
벌써 대보름이 왔구나.
영은이가 윤경자의 글을 다시 보게끔 올려주어 고맙구나.
경자야 오랜만이야
우리 인사회에 홈피가 있어 이런 너의 훌륭한 글솜씨의 글도 또 읽어볼수가 있구나.
우리집 현관에는 너가 써준 한자로 된 주기도문이
붙어있어 항상 보면서 고마워 하고 있지.
우리 홈피에서 자주 만나 소식 전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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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자
2024.02.24 11:02
동연ㆍ은영 친구!
여기에서 이렇게 대화하며 칭찬을 받고 보니 너무 고맙고 반갑습니다.동창회보에서 수필이란 것을 난생 처음 써볼 수 있었는데 동창회 홈페이지에서도 이렇게 민망스럽고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네요.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은영아! 아직도 기도문을 간직하고 있다니 내가 더 고마워.^^ -
박일선
2024.02.24 11:56
얼마 전 동창 모임에서 처음 뵌듯한 윤경자 씨, 참 글도 잘 쓰시네요. 웬지 가슴에 무척 와 닷는 글이네요. 김승자 씨 댓글에 보니 동창회 표제를 쓰신 바로 그 분이네요. 다음에 뵈면 몰라보지 않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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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자
2024.02.24 13:00
저는 가끔 자전거로 세계 여러곳을 여행하시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황영호
2024.02.24 21:09
오늘이 바로 정월 대보름날이군요.
동문 윤경자님의 정 넘치는 글 '정월 대보름날에'를 주홍색 빨강 바탕에 하얀색 글자로 돗보이게 올려놓으셨습니다.
돌아가신지 20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윤경자님의 어머님에대한 생전에 못해드린 아쉬움과 그리움,
먼저 가신 부군에대한 남 모르른 애틋한 마음을 써내려간 글은 읽는 이를 가슴 저미게 합니다.
먼 전날 우리가 젊었을 시절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풍기는 인정 넘치고 소박한 풍경을 담아 물 흘러내려가듯 써내려간
윤경자님의 글 솜씨가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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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자
2024.02.25 11:07
분에 넘치는 말씀 감사합니다.
영주의 아름답고 고즈넉한 영상은,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며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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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있으면 정월 대보름.
몇년전 회보에 실렸던 윤경자의 '정월 대보름날에' 글이 떠 올랐다.
구수하고 맛갈나게 보름 나물 이야기를 펼치며 지금은 빗 바랜, 그러나
우리 정서엔 훈훈하게 베어 있는 보름 나물, 옛 향수를 자극하게 한다.
무심한 세월 따라 든든한 가족도 떠나지만 사랑하는 손주들과 보름달 처럼
함박 웃음 보따리로 ㅎㅎㅎ 지내렴! 아름다운 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