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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외할머니의 간장밥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어린 시절… 엄마 보고 싶어 일부러 심통
그때마다 혼내지 않고 등 토닥이며 비벼주시던 간장밥 ‘꿀맛’
상추따러 갔다 넘어져 돌아가신 날, 마루엔 간장밥이 놓여있었다.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어린 시절, 부모님의 맞벌이로 대부분 혼자 있었다.
늘 미안했던 어머니는 이모네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논과 들과 산이 있는 시골이었다.
이모와 누나들과 외할머니가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심술 덩어리였다.
밥을 먹다가도 많이 먹으란 말을 들으면 숟가락을 놓았다.
새 옷을 사주면 냇가에 들어가서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놀았다.
심부름을 시키면 뒷산에 올라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갔다.
혼날 마음을 먹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었는데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항상 나를 감쌌기 때문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나를 감싸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더 심하게 말썽을 부려도
외할머니는 언제나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토닥거림이 괜히 서러워서 자주 울었다.
어린 나는 아마도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울 때마다 외할머니는 간장과 참기름에 밥을 비벼주었다.
그저 쓱쓱 비볐을 뿐인데 언제나 꿀맛이었다.
때로는 간장밥이 먹고 싶어서 일부러 울었다.
외할머니는 장날에 다녀올 때마다
종종 나를 위해 새로 짠 참기름을 사오곤 했다.
그 참기름을 보자마자
오늘은 무슨 이유로 울어야 할지 열심히 고민했다.

간장밥을 먹으며 나는 나이를 먹어갔다.
새해가 오고, 설날을 거쳐, 어버이날이 다가왔다.
나는 전날 밤부터 들떠있었다.
엄마가 외할머니를 만나러 온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기다렸는데 엄마는 오지 않았다.
나는 또 슬슬 심통을 부리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간장과 참기름을 꺼내들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간장밥을 먹고 있는데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숟가락을 내던지고 달려나갔다.
차에서 내리는 엄마에게 뛰어들었다.
외할머니도 지팡이를 짚고 뛰어나와 막내딸을 얼싸안았다.
고기를 구워준다며 직접 기른 상추를 따오겠다고 했다.
같이 가겠다는 엄마를 호통까지 쳐가며 마루에 앉혔다.

엄마는 나에게 용돈을 주었고, 난 그길로 마을 수퍼로 달려갔다.
외할머니가 달리다 넘어진다고 소리쳤지만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달렸다.
수퍼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과자를 골랐다.
수퍼 앞에 설치된 게임기에 동전을 쌓아놓고 신나게 게임도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양손에 과자가 가득한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와 이모들의 울음소리였다. 느낌이 이상했다.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외할머니를 부르며 대문을 열었다.
마당 평상에 외할머니가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엄마와 이모들이 그런 외할머니에게 매달려 울고 있었다.
상추를 따기 위해 밭으로 향하던 외할머니가
비탈길에 미끄러져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구급차가 왔고, 외할머니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채 실려갔다.
마루에는 외할머니가 비벼준 간장밥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나는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 밥을 먹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외할머니가 다시 집에 돌아오면,
그 밥을 보란 듯이 맛있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나면, 또 한 번 심통을 부리면,
어디선가 간장과 참기름을 들고 나타날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고, 문득 배가 고파진 나는
무심결에 간장과 참기름을 밥에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다 비벼진 밥을 한입 떠먹은 순간, 울음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열심히 비벼도 외할머니의 간장밥 맛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울어도 외할머니가 나타나서 밥을 비벼주지 않았다.
그저 혼자 울고 혼자 밥을 비빌 뿐이었다.
내가 과자를 조금만 덜 골랐더라면,
게임을 한 판만 덜 했더라면,
외할머니를 따라 상추밭으로 갔었더라면,
좀 더 오랫동안 외할머니의 간장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나는 어른이 되었다. 오래된 술버릇이 생겼다.
술 취해 집에 돌아오면

자동적으로 간장과 참기름을 집어들고 밥을 비빈다.
여전히 그때의 그 맛은 나지 않고,
이상하게도 허기는 계속 채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간장과 참기름에 밥을 비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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