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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부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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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 하늘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오 세 윤




 어머니가 떠나셨다. 수 아흔 일곱, 토끼해 시월에 태어난 어머니는 같은 토끼해인 辛卯년 정월 초하룻날 저녁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동갑나기인 선친보다 보름 먼저 태어났던 어머니는 선친을 보내고 꼭 스무 해를 더 있다 그분 곁으로 갔다.


 모여 선 육남매, 아들 셋 딸 셋, 낳은 자식 중 하나를 어려서 교통사고로 잃은 것 외에 어머니는 어느 자식도 앞세우지 않았다. 어느새 환갑나이가 된 막내의 머리에도 희끗희끗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다.


 가시기 전 마지막 한 해 동안 어머니는 둘째딸과 막내가 사는 일산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그들의 돌봄을 받았다. 운명하시자 막내가 애초 논의되었던 대로 어머니를 근처 동국대 일산병원으로 모셨다.


 

 

 우리는 장례를 직계만으로 치르기로 했다. 조용하게 치르면서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와 우리들 서로 간에 있었던 날들을 이야기하고, 슬퍼하고 싶었다. 선친이 타계했을 때 우리는 손님을 맞고 번다하게 장례절차를 따르느라 아버지를 깊게 이야기하고 오롯이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장장 아흔 여섯 해를 우리들 곁에 살아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워 마지막 가는 길은 우리들만으로 조용하게, 올곧게 배웅하고 싶었다.

 

 

 더구나 새해가 시작되는 정초요 연일 영하를 밑도는 추운 날씨인데다 이곳 장례식장은 교통마저 불편해 문상객이 와주는 것만도 민망했다. 게다가 우리들 나이도 생각하게 된 때문이었다. 형제 중 한 둘은 그간 사회생활을 해 오면서 남들에게 부주한 것도 적지 않으니 도움을 받아 부끄러울 게 없다고도 했지만 앞으로의 행보를 생각하면 꼭 그렇게 이해만을 앞세울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가까운 일가친척이라 해도 상갓집에 머리 허연 노구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아 보였기에 칠십을 넘긴 나이들은 남의 혼상에 드나든 일만큼은 자제해야 할 터이라고, 더 이상의 상부상조하는 인연에서는 비켜서는 게 옳다는 주장으로 나머지들을 이해시켰다.

 

 

 우리가 사는 것은, 더더구나 생산을 못하고 사는 노후란 의식주 어느 것 하나까지 모두 남들의 수고이니 그게 다 빚일 뿐이 아니던가. 가는 길에까지 남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선친과 같은 해 같은 해주시내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해주여고보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구여상에 입학했다. 하지만 모친상고(喪故)를 당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집에 내려와 외조부의 사업을 도우며 살림을 맡아했다. 반년쯤 뒤 외조부가 재혼하여 집안이 안정될 쯤 전화국에서 취업을 권유해 왔다. 당시로서는 여자가 중학을 중퇴했다는 건- 특히나 지방 소도시에서는 더욱- 보통을 넘는 고학력이라고 했다. 용모가 단아하고 음색이 고운데다 말씀이 분명하여 적격이었노라고 어머니는 그 직장생활을 자부심을 가지고 말씀 하시고는 했다.

 

 

  열아홉에 만나 일 년여의 열애 끝에 약혼한 아버지가 만주의 신경은행으로 발령을 받아가자 어머니는 3년을 더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두 분이 저축한 돈으로 해주항 옆에 발동선박 수리공장을 차리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은 성공적이어서 채 5년도 되지 않아 갑부라는 소문을 들을 정도로 선친은 부를 쌓았다. 그리고 창업 8년째에 광복을 맞는다.

 광복 두어주 지나 거센 흥분이 찹찹해질 쯤의 어느 저녁, 어머니는 바닷가 모래밭에 돗자리 서너 장을 깔고 우리 세 남매와 동네 아이들과 아낙들을 불러 모아 앉혀 놓고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올드 랭 싸인’ 곡에 맞춘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리고 그 겨울 남동생을 낳고 이어 이듬해 3월, 쫓기듯 우리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운송업을 시작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부침을 거듭하는 동안, 어머니는 두해 터울로 연이어 동생들을 낳았다. 육아와 살림에서 어머니는 헤어나지 못했다. 고향 바다에서 작은 돛배를 타고 낚시를 즐기고, 서울로 대동강으로 월미도로, 멀리는 일본으로까지 여행을 즐기던 어머니의 낭만은 거기에서 그쳤다. 할머니와 함께 어머니는 온종일 바빴다. 아플 새도 없었다.

 선친의 사업이 궤도에 오를 쯤 6·25 전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충청도로의 피란. 그곳에서 어머니는 그간의 여리고 부드럽던 모습과는 정 반대의 억척스럽고 강퍅한 장사꾼으로 변신한다. 5일장을 쫓아다니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복과 내복 따위를 구해 팔고, 해산물을 취급하며 아버지를 대신해 식구들의 입을 책임졌다.

 

 

 

  피란생활 끝 해 가을과 겨울 어머니는 담배 밀매를 했다. 어스름이 내린 다음 나와 아버지는 읍내를 벗어나 인근 농가들을 돌아다니며 공납하고 남겨 숨겨둔 담배 잎들을 모아들였다. 이것들을 물을 축여가며 차곡차곡 쌓아 한 뭉치가 백 근이 되게 두세 개를 만들어 밤에 상경하는 트럭 짐칸에 어머니와 함께 실었다. 어머니도 다만 한 둥치 짐일 뿐이었다.

 

 

 

 어느 때는 여의나루 쪽, 때로는 흑석동이나 잠실나루, 뚝섬 인근에서 몰래 한강을 건넜다. 짐꾼에게 두 둥치를 지우고 한 둥치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나룻배를 타기위해 칠흑같이 어두운 밤 모래사장을 허위단심 걸을 때면, 매듭이 느슨해진 포대기 틈사이로 강바람이 매섭게 파고들고, 등에 업힌 막내의 오줌 싼 기저귀가 얼어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서걱서걱 가슴 할퀴는 소리를 냈다고, 그때의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을 훔치셨다.

 

 

  피란생활을 끝내고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천으로 이사한 다음 날, 짐도 풀지 않은 채 어머니는 서울 집부터 가보셨다고 했다. 안방에 들어서 자개장롱의 부서진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걸 넋을 잃고 바라보던 어머니는 곧장 부엌으로 내려가 아궁이의 재를 헤쳐가며 한 식경 나마를 그을린 자개쪼가리를 찾았다. 혼수로 손수 장만한 여덟 자 자개장롱, 문창호지를 통해 햇살이 비쳐들면 살아있듯 움직이던 사슴과 거북들, 꿈틀거리던 소나무. 고향을 쫓겨 떠나오면서도 어머니는 그 십장생 자개농부터 우선 먼저 배에 싣게 했었다.

그런 때문인지 생활이 안정되고 난 뒤에도 어머니는 형편이 조금만 나아지면 장롱부터 업그레이드했다. 졸라대는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도대체 언제 철이 들 거냐며 웃기는 하면서도 막거나 나무라지를 않았다.

 

 

 

 피란지에서의 어머니의 억척은 인천에서 치맛바람으로 변했다. 과외학원으로 피아노학원으로, 열성 학부형으로 동생들의 학교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런 덕분에 동생들 모두 서울로 진학하게 되기는 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 봄 아버지가 서울 본사로 오게 되어서야 우리는 수도에 재 입성했다.

 서울로 이사한 다음부터 어머니는 다시 옛날의 평화롭고 조용한 살림 아낙으로 되돌아갔다. 새롭게 교회에 나가며 신앙생활을 시작해 집사로 봉사했다. 내가 군복무로 월남에 가있는 사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회복된 아버지가 재발되어 누워 지내던 끝 10년간, 어머니는 혼자 아버지를 돌보며 화곡동 집에서 조용하게 지냈다. 목욕을 시켜드리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말동무를 해 드리고, 욕창하나 생기지 않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선친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어머니는 참으로 큰, 깊고 큰 은혜였다. 

 

 

 

 지난 6년 동안, 어머니는 친구를 따라 실버타운에도 계시고, 춘천의 막내딸네 에도 머물고, 막내와 둘째딸이 사는 일산에도 살며 효를 다하게 했다.

 고운 모습이 한줌 재가 되어 담긴 상자를 안고 나오는 나에게 어머니가 허공에서 읊으셨다.



 

 

미련을 태웠노라

회한도 태웠노라

인연은 한 줄기

연기로 날렸노라



 

한줌 재로 남았노라

그 마저도 버리노라

바람으로 넋 흩트려

자취 거둬 떠나노라

    

 

 열여섯 철없는 마음으로 아흔 여섯 해를 산 어머니. 어머니, 좋은 곳으로 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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