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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호박찌개

2009.08.13 14:13

오세윤 조회 수:310

 











 





고추장 호박찌개




                                                                                                                                                      오 세 윤




 모임 뒷맛이 떫다. 봄가을로 한해 두 차례 열리는 재경 향우회, 일이 있어도 얼굴 마주치기 탐탁찮은 떠버리 N이 불우지변(不虞之變) 참석해 내용 모호한 수다로 귀를 피곤하게 한 때문. 파장이 되기 전에 자리를 떴다. 모처럼 참석한 모임이 실망스러우면 오고가며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 매양 뒷맛이 떨떠름 씁쓸하다. 하여 업을 놓은 뒤로는 눈 두기 편치 않은 자리, 마음이 흔쾌히 동하는 곳이 아니고는 되도록 걸음을 삼간다.  


 들어서는 나를 흘낏 살핀 아내가 저녁식탁에 어김없이 또 고추장 호박찌개를 끓여 내고 곁에 소주 한 병 곁들인다. 노래도 빠트리지 않는다. “성났다 골났다 호박 국을 끓여라.” 잔을 채우며 살근살근 동요 한 자락을 부른다. 엉켰던 속이 시나브로 풀어진다. 귀신같은 마누라, 어떻게 그렇게 번번이 남의 속을 장님 손금 보듯, 거지 동전 세듯 훤하게 꿰뚫어 본담.


 

 어린시절, 어느 하나가 토라지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둥그렇게 그 아이를 감싸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성났다 골났다 호박 국을 끓여라.” 그냥 마음을 다독여 풀어주기 위한 한갓 방편으로 만들어진 동요이긴 하겠지만 어쩌면 호박에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능을 가진 기특한 어떤 효소가 정녕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모양새부터 벌써 둥글둥글 모난 구석이 없는데다 살갗도 유순하고 색상 또한 연푸른빛이라 보기만으로도 벌써 넉넉하지 아니한가. 한식집에서 술 마시기 전 호박죽이 나오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모임을 자제해도 한주에 두어 차례는 필히 나갈 일이 생긴다. 수필문학행사나 모임은 대부분 오후에 있어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참석하면 되고, 중 고등 동창들은 모두 정년을 넘긴 나이들이라 주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나는 탓에 별 부담이 없다. 가끔은 마음 편한 옛 벗을 만나 부담스럽지 않은 값의 맛과 영양가 만점의 점심을 먹고, 바둑을 서너 판 비슷한 승률로 두고 나서 술 한 잔 기울이던가 아니면 치기 어리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당구장에서 체면이고 뭐고 훌러덩 벗어던지고 시시덕거리다 오기도 한다.

 

 하지만 만남과 모임이 매양 즐겁고 의미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간혹은 위의 N같은 몰염치를 마주치거나 혹 그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오게 되는 날도 있어 그런 날엔 속이 건들장마에 설마른 생선 배알처럼 흐물흐물 상해 울근불근 불뚱밸로 들어오기 십중팔구다. 그런 저녁이면 아내는 제 먼저 속을 깔축없이 헤아려 의례처럼 호박찌개를 끓여내고, 나는 그걸 먹으면서 엉켰던 속을 해파리처럼 풀어내고는 한다.

 

 그나저나 왜 호박찌개가 옛날보다 맛이 덜할까. 손맛 좋은 아내가 한우양지까지 넣어 끓인 찌개가 왜 이전 같은 감칠맛이 안 날까. 입이 고급스러워져서일까 혀가 인공조미료 맛에 길들여져서일까. 제철 산출이 아니라서 일까 하우스에서 키운 것이라 일조량이 적어서일까. 아니면 제 거름을 해 키우지 않은 탓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고추장 때문일까. 불현듯, 어린 시절 우연한 기회에 먹어봤던 호박찌개의 달큼 맵싸한 뒷맛이 마치 소의 되새김질처럼 목구멍을 타고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정확히 60년 전의 해프닝.

 

 

 1949년 여름, 초등학교 5학년 한반 친구이던 우리 다섯은 홍제천에 나가 일요일 하루를 놀다오기로 하고 아침 일찍 영천 전차종점에서 만나 무악재를 넘었다. 가재도 잡고 밥도 해먹으며 놀고, 오는 길에 자문 밖(자하문 밖- 현재 구기동과 평창동 일대) 능금과수원에서 자두와 능금을 사오기로 일정을 잡았다.

두 시간 쯤 신나게 물에서 놀다 나와 냇둑 안침한곳에 솥을 걸고 불을 때기 시작해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불은 무참하게 꺼지고 김이 나던 양은솥은 삽시간에 서느렇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소나기는 바로 그쳤지만 밥은 반생반숙(半生半熟), 디글디글하기가 생쌀이나 한가지였다. 시장기가 갑자기, 더 심하게 밀려들었다. 뱃속이 쓰리다 못해 끊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우리들 곁을 마침 지나가던 초로의 할머니가 보고 상황을 알아챈 듯 끌끌 혀를 차며 손수 거두어 모두를 뒤따라오게 했다.

 

 반 마장 쯤, 둑길아래 앉은뱅이처럼 내려앉은 외딴 초가집. (순간적으로 그때 나는《검둥이 톰 아저씨-Uncle Tom's cabin》의 오두막을 떠올렸다.)하나뿐인 안방, 한낮인데도 방안은 저녁참처럼 어둑했다. 한참 만에 할머니가 차려내온 소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다섯 그릇과 열무김치, 그리고 달랑 냄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고추장 호박찌개, 우리들은 인사고 체면이고 없이 허겁지겁 상 앞에 달려들어 게 눈 감추듯 정신없이 퍼먹었다.

 

 그때는 물론 이제까지도 나는 그렇듯 달고 감칠맛 나는 호박찌개는 먹어보지 못했다. ‘꿀맛 같다.’란 표현이 오히려 욕이 될 고추장 호박찌개, 왜 그처럼 맛이 있었을까. 때를 한참 넘긴 시장 끼 때문이었을까. 들녘바람과 쨍한 햇살을 듬뿍 받고 자란 애호박 때문인가. 마당귀 볕바른 장독대에서 한껏 흐벅지게 익어 뒷맛 오래도록 입안 가득 감도는 달콤 매콤한 고추장 때문일까. 아니면 할머니의 열두 폭 너른 덕과 손맛 때문일까.

 

 

 그날 이후로 고추장 호박찌개는 꾸준하게 내 식선(食膳)의 최상 석을 고수하고 있다. 호박찌개를 대하면 마음이 풀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도 어쩌면 그날 그 할머니의 넉넉한 성정에 감복됐던 기억 때문일 거라고 슬며시 원인풀이를 한다.

아내가 끓여준 호박 찌개를 앞에 놓고 나는 이 저녁, 얼굴도 기억 못하는 그때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참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뚱맞은 욕심 하나를 더 낸다. 더 늦기 전에, 그리 멀지 않은 교외에 텃밭 딸린 집을 장만해 밭두렁에 구덩이를 파 망옷을 넉넉하게 채우고, 들바람 싱그러운 밭둑 위 쨍한 봄 햇살에 나앉아, 문우들이 보내오는 수필집을 읽는 즐거움에 시간을 잊는 호사나 누려야할까 보다고 참 신선 같은 꿈을 꾼다. 장마에 우울해졌을지도 모를 지인들에게 갈무리한 애호박도 좀 보내고, 찾아오는 벗들에게 호박찌개도 끓여냈으면 하는 참 대견한 바람을 한다. 60년이 지났음에도 그날 그 호박찌개의 감치는 뒷맛은 엊그제인 듯, 여전히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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